운동을 유난히 좋아하는 남편과 사는 40대 아내가 남편은 좋아하는 운동경기만 하면 TV 앞에 붙어 있고, 또 경기장에도 자주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두 번 정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시는 안 간다는 겁니다. 별 재미도 없고 지루해서 중간에 나가자고 해도, 남편은 끝까지 봐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아주 질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백화점에만 가면 또 성질을 그렇게 부린다고 합니다. ‘살 거냐, 안 살 거냐, 왜 이렇게 사람을 끌고 다니냐!’ 하면서요. 그래서 이젠 아내 혼자 백화점에 가고, 남편 혼자 경기장에 가기로 이야기되었답니다. 많은 부부가 대개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요.
쇼핑과 운동은 어쩌면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우리 삶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부부가 늘 이 문제로 부딪히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한 생각마저 들곤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쇼핑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남자들은 운동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남녀 할 것 없이 대부분 쇼핑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죠. 다만 즐기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어느 작가가 한 칼럼에서 “백화점은 신이 남편에게 내린 저주”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영국의 어느 유명 백화점에서 성인 남녀 10명을 대상으로 만보기를 채워 쇼핑 시간과 걷는 양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는데, 여성은 한번 쇼핑하는데 약 2시간 30분 동안 5킬로미터 정도를 걸었고, 남성은 5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약 2.5킬로미터를 걸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칼럼을 읽으며 아내와 있었던 웃지 못할 일화를 떠올렸습니다. 모처럼 아내의 요청도 있고, 대화도 나눌 겸 해서 백화점에 따라갔죠. 아내는 정말 즐거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팔짱도 끼고 쉼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드디어 백화점 1층 잡화 코너에 들어선 아내는 조용해지더니, 상품으로 가득 찬 매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핸드백, 구두, 액세서리, 화장품...등등. 정말 눈에 보이는 매장마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빙빙 도는 나와 달리 아내는 핸드백도 들어보고, 구두도 신어보고, 액세서리도 끼워 보고 점원들과 얘기도 나누면서 아주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건을 사지는 않더군요.
나는 슬슬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벌써 1시간째 사지도 않을 물건을 왜 저렇게 보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2층 의류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지금까지는 몸풀기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죠. 첫 번째 옷 가게로 들어간 아내는 이 옷 저 옷 골라 입어 보며 “여보, 이 옷 어때요?” 내게 물었습니다. “음, 괜찮아 보이는데?” 하니까 아내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옷을 진열대에 도로 걸어놓더니 “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사지도 않을 걸 왜 나한테 물어보았는지, 기분이 별로 안 좋더라고요. 그런데 두 번째 매장, 세 번째 매장에 가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렸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더 신이 난 듯했습니다. 부글부글 부아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네 번째 매장에 들어갔습니다. 아내는 이번에도 이 옷 저 옷 들어보다 하나를 골라 입고서는 “여보, 이 옷 어때요?” 나는 이때는 정말 사는 줄 알았습니다.
“음 아주 괜찮아 보이는데...”했지만,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내는 옷을 갈아 입고 나와 또 “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가는 아내를 뒤 따라 가며 폭발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그래도 잘 참았는데, 다섯 번째 매장에 들어가 옷 하나를 들고, “여보, 이 옷은 어때?”라는 순간 나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갑자기 폭발하는 성격은 아닌데, 순간 뚜껑이 열려서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대체 살 거야 말 거야? 왜 이렇게 사람을 끌고 다녀! 도대체 몇 시간째야!” 당황한 아내에게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난 갈 테니까, 당신 맘대로 햇!” 그 길로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왔죠.
이 일로 인한 후유증은 참으로 오래갔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만 해도 아내에게 잘못이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 있는 아내를 이해하기 어려웠죠. 나중에 가정사역을 공부하고 나서야 아내를 이해하게 되었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았습니다.
여자는 쇼핑 자체도 즐겁지만, 남편과 함께 하는 것을 더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남편과 함께 물건을 보고 눈을 맞추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여자들의 그런 심리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쇼핑하러 갔으면 물건을 사야지, 거기서 왜 눈을 맞추고 의견을 나눈다는 거지, 참 이상하기 짝이 없는 거죠.
여기서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남자는 쇼핑이라는 과업을 달성하는 데 집중하고, 여자는 쇼핑의 과정 안에 관계를 두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쇼핑하러 갔으니 물건을 사야 직성이 풀리고, 여자는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 자체가 만족스럽다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그래서 영국이나 미국 백화점에는 남편 돌봐주는 코너도 있다고 합니다. 요즘 온라인 쇼핑이 인기가 있는 이유도 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다르니 존 그레이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까지 표현했겠지요? 그러니 관건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나와 같지 않다고 타박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용납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