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방 구할 돈이 없어서 당신 이름으로 대출받아 신혼살림을 시작하던 그때를 떠올리면 아련해집니다. 행여라도 내가 무시당할까 봐 친정 식구들 앞에서 일체 함구하던 당신, 항상 고맙고 미안하고, 당신을 만난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몇 년간 애를 갖기 위해 시험관 아기도 시도해보고 입양도 생각해보고 그러면서 우리 아들 근용이가 태어났지요. 너무나 벅차고 소중한 기억, 그 감동과 기쁨으로 잘 살아 보자고 둘이서 각오를 다지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우리 둘째 근준이가 24개월이 되어서 자폐성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나는 나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괴로워하고, 세상을 원망했고 당신은 당신대로 두 아이를 끌어안고 동분서주하면서 살았지요. 또 지금까지 그렇게 살고 있지요.
명희 씨, 동생 때문에 상처 많고 자존감 낮은 근용이와 갈수록 자폐 성향이 강해지는 근준이를 보살피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당신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을 핑계 삼아 밖으로만 싸도는 내가 원망스러웠지요?
우리 둘의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인데 사춘기 아들과 장애 있는 아들을 당신에게 떠맡겨서 너무 미안합니다. 아이들로 상처받은 당신, 엄마로서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당신을 나는 비겁하게 외면했습니다. 나는 너무 준비 없이 맞다 보니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들처럼 살려고 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지금, 이 순간 너무 늦지 않았다면 우리 짐을 같이 나눌 기회를 줄 거지요? 환경 탓하며 외면했던 지난날을 바로 보고, 이제 근용이에게 아빠로서 역할을 다하고 싶습니다. 이제 서로 마주 보며 이 상황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돌려봅시다.
생각만 해도 콧날이 시큰해지는 당신, 나를 더 배려해주는 소중한 사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사람인데, 함부로 말하고 나만 생각하며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좋은 일이나 궂은일, 어떤 일이든지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말을 듣고 배려하고 더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