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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아픔에 귀 기울이다
작성자 정아혜 작성일시 2018-06-25 19:20:33.0 조회수 295 연월 201806

 


베트남의 아픔에
귀 기울이다

구수정 |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취재, 글 : 정아혜 / 사진 : 윤동혁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피해를 입은 그들 은 50여 년간 처참한 고통을 안고 살아왔다. 그들의 이야기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때, 피해 마을의 생존자들을 찾아가 못다한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은 한국인이 있었다. 20년 가까이 그들의 사연을 한국 사회에 알리며 진실 규명 활동을 해온 한베평 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를 만났다.
 


충격적인 역사와 대면하다
내가 유학 갔던 1993년은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가 재개된 지 1년쯤 될 때라서 베트 남에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1995년 6월, 우여곡절 끝에 호치민 국립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 석사 과정에 수석 합격했다. 대학원 2년 과정을 마치고 ‘한국군의 베트남 전 개입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이런저런 경로로 자료를 구하다 우 연히 20여 쪽 분량의 베트남 정부기관 문서를 손에 넣었다.

누런 습자지 위에 녹색 잉크로 타자를 친 문서는 어린이, 여성, 노인, 임산부, 학살 등의 단어만 눈에 띌 뿐 판독이 불가능했다. 같은 대학의 베트남 친구에게 필사를 부탁했다. 필사본을 받기로 한 날,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서야 친구는 자료를 던져주고 그냥 사라졌다. 필사본을 한 장 한 장 읽으며 친구가 왜 차갑게 돌아섰는지 알았다. 그 안에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 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몹시 충격적이었다. 감히 그 자료로 뭘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아 책상 서랍에 1년 넘게 넣어두었다. 이전까지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했을 거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아서 자료를 그대로 믿기 힘들었다. 과장된 얘기거니 외면하려는데, 자꾸 눈길이 서랍을 향했다. 그즈음 일본의 평화단체 ‘피스보트’를 탄 몇몇 한국 작가를 만났다. 그 들은 일본인 손에 이끌려 베트남 다낭의 한국군 학살 지역에서 비문을 보고 피해자 들을 만났다고 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고민 끝에 그들에게 서랍 속 자료를 보여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기로 뜻을 모았다. 1999년 봄, 진위를 밝히기 위해 자료 속 마을을 찾아갔다.

카이! 카이! 카이!
베트남 중부 지역의 한국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45일간 답사했다. 나는 학살 이후 처음 마을에 나타난 한국인이었다. 그들 역시 30년간 단 한 번도 한국인과 마주한 적 이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한국인에게 수십,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일제 히 “카이! 카이! 카이!(진술하겠다)”라고 외쳤다. 절박한 눈빛으로 가슴 속 켜켜이 쌓아둔 응어리를 터뜨렸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핏빛 증언들은 자료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많은 분이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했고 눈물이 통곡으로 번졌다.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럴 때마다 그분들은 내 손을 잡으며 “울지 마, 내가 미안해. 너를 아프게 하려 고 한 게 아니야. 내가 울지 말아야 하는데, 너를 울려서 미안해”라며 도리어 미안해 하거나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하루 종일 이야기 듣는 나를 위해 코코넛, 바나나, 감자 등 먹을 것을 끊임없이 내오셨다. 한 분은 대야에 물을 떠서 손을 씻으라고 했다. 손을 씻자, 먹을 것을 계속 입에 넣어주었다. 배부르다고 하자 또 물을 가져와 손 을 씻고 입을 헹구라고 했다. 돌에 맞아 죽을 각오로 마을에 들어갔으나 그들은 나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 이 따뜻함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응우옌 티 탄과 구수정 상임이사
 

고통을 꺼냈을 때 일어난 변화
수많은 분 중에서도 릉 티 퍼이 할머니와 만남은 특별했다. 처음 악수를 나눌 때 할머니가 내 손과 팔을 세게 꼬집어서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리고는 본인이 겪은 참상을 덤덤히 털어놓았다. 한국군의 학살로 두 자식을 잃고 뱃속의 아이는 사산하고 다리를 잃은 그녀는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다시 떠올리기 끔찍한 기억을 그녀는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그 한을 씻을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위로해 드리고 싶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처음 한두 번은 무심한듯 했지만 다섯 번 쯤 갔을 때 할머니는 내 앞에서 소리치며 통곡하셨다. 한 맺힌 할머니의 가슴 속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 후 할머니가 사는 마을에 공원조성 행사를 열었는데 거동이 불편하셔도 제일 먼저 오셔서 마지막까지 남아계셨다. 행사를 진행하느라 미처 챙겨드리지 못해도 할머 니는 멀리서 나를 계속 바라보셨다. 할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보는 마을 사람들을 ‘무뇌아’라고 욕했다. 어떻게 30년 전 마을을 깔아뭉갠 나라의 드라마를 보며 낄낄댈 수 있냐며 비난했다. 그런데 몇 년 후, 할머니 댁을 방문했을 때 몹시 어색한 몸짓으로 자꾸 벽을 가리셨다. 할머니 등 뒤로 당시 베트남에 유행하던 한국 연예인 달력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할머니는 수줍게 말씀하셨다. “우리 딸이 좋아해서··· 난 아니야.”

퐁니, 퐁넛 사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 아주머니는 한국인에게 본인의 사연을 호소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여러 명의 한국인을 보면 아주머니는 무서워서 뒷걸음질만 쳤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리기만 여러 번, 그래도 아주머니는 거듭 다짐했다. “다음에는 꼭, 꼭 말할 거야.”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역시나 아주머니는 고개를 돌리고 아이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세 번째 찾아갔을 때, “너희들은 세상 잘 만나고, 부모 잘 만나서 좋겠다. 나는 너희 만할 때 눈앞에서 가족을 잃고 생사를 넘나들었는데···.” 아주머니는 한바탕 쏟아내며 대성통곡하셨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비참한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는 아이들이 미웠나보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을 자식처럼 예뻐하신다. 그 후 아주머니는 한국 여성과도 마주할 수 있었지만 한국 남성은 여전히 피하셨다. 그러나 2015년 한국을 다녀가신 후, 이 트라우마 역시 깨끗이 사라졌다. 이제 아주머니는 건장한 한국 남성을 보고도 잘 안아주신다. 곪은 상처에서 농을 빼내야 새살이 돋는다. 아프고 힘들지만 그들이 가슴에 묻어둔 고통을 말하고 우리가 진심으로 들을 때 그들은 조금씩 회복된다.

미안해요 베트남!
1999년 5월 베트남전의 진실을 처음 국내에 알리고 연이어 기사를 내보냈다. 첫 르 포가 나간 후 ‘베트남에 사과하고 싶다’는 메일을 하루 1,000통 넘게 받았고,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했다. 끊임없이 성금이 모이고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이 벌어지면 서 베트남 평화기행과 의사 단체의 진료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지속가능한 평화 운동으로 이어가도록 평화재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곳에 도움을 구했다. 놀랍게도 누군가 시작하기를 바란 것 마냥, 모두 적극적 으로 도와주셨고 곳곳에서 많은 후원금을 보내주셨다. 이를 발판으로 ‘한베평화재 단’이 지난해 출범했고 ‘사회적기업 아맙(한베평화재단 베트남 지부)’, ‘아시아공정무 역네트워크’까지 세워졌다. 베트남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한 한국인의 마음이 모여 서 이뤄진 일이라 뜻깊다.

평화는 공감에서 공감은 경청에서
1999년 처음 피해자를 마주한 순간,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등을 떠미는 것은 그분들이다. 베트남으로 평화기행을 온 아이들은 피해자를 만나면 온몸으로 이야기를 듣는다. 진실을 듣고 힘들어하지 만 곧 한국에 돌아와 ‘베트남을 기억하자’는 문구를 적은 엽서를 팔아서 후원금을 보 내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이런 비극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아프셨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온 마음으 로 들어야 한다. 이는 가해자를 책망하고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피해자들이 토로 하는 사실을 듣고 온전한 사과와 용서, 화해를 이루기 위함이다.

나에게 소명의식이 있어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가까이 있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평화란 거창한 게 아니다. 상대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 같이 아 파하는 것, 그것이 평화다.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마주하고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통 해 화해로 나아가자는 취지로 세워졌다. 그래서 피해자들에게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 전 퐁니, 퐁넛, 하미 등 피해 마을에 들어갈 때, 한국의 인삼차를 선물로 준비했다. 인삼차를 가득 채운 내 키만 한 배낭을 앞뒤로 메고, 양 손 한가득 가방을 들고, 50도 넘는 땡볕 아래 시골길을 걸어 다녔다. 길을 걸으며 ‘30년 전에 지금보다 훨 씬 울퉁불퉁했을 이 숲길을 우리 군인도 걸었겠구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어디서 날 아올지 모를 총알과 부비트랩에 몹시 두려웠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갓 소년티를 벗은 20대 초반 청년들이라는 사실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세월호 사고 이후 광화문에 갔을 때, 한 의경과 눈이 마주쳤고 그의 앳된 얼굴과 보송보송한 솜털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 베트남에 간 군인들은 이런 애들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참전군인 하면 60, 70대 할아버지만 떠올렸는데 내 동생, 내 아들 같은 남자애들을 그 전쟁터로 보냈다니 몹시 마음이 아팠다. 피해자의 고통에만 몰입하여 참전군인의 아픔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국가의 부름으로 낯선 타국에 가서 공포와 싸우며 원치 않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군인들 역시 피해자다. 선량하고 평범한 그들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위험한 베트콩의 근거지에 한국군이 집중 배치됐고 귀국을 며칠 남겨두고 많은 군인이 전사했다. 살아 돌아온 군인은 물론 남편과 자식을 잃은 유가족에게도 베트남전은 떨칠 수 없는 악몽이다. 이들의 목소리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아직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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