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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 마음을 뺏기다
작성자 정아혜 작성일시 2018-06-25 18:28:21.0 조회수 155 연월 201806

 


그림책에
마음을 뺏기다

정병규 | 어린이서점 동화나라 대표
취재, 글 : 정아혜 / 사진 : 김승범



여기 화가가 꿈이었던 소년이 있다. 장성한 소년은 어린이서점 대표, 작가, 문화기획자, 강연자, 책임연구원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화가는 되지 못했지만 그림을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기에 그의 삶은 늘 그림을 향했다. 20년 넘게 어린이서점 ‘동화나라’ 를 지켜온 정병규 대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순수한 열정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에스프레소와 볼로냐 아동도서 박람회
어렸을 때는 마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아 화가가 되고 싶었다. 미술 대회에 나가 상을 곧잘 탔기에 소질이 있는 줄 착각하며 유명한 화가가 된 나를 꿈꿨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사는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슴에 늘 그림을 품고 있어서였을까? 다 른 방향으로 흐르는 듯했던 삶은 제자리를 찾아갔다.

해외여행이 막 자율화된 1989년 어느 날, 회사 구형 팩시밀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 통의 문서를 뱉어냈다. “볼로냐 아동도서 박람회 여행 상품”이라는 제목에서 ‘볼로냐’가 눈에 쏙 들어왔다. 유서 깊은 도시 이탈리아 볼로냐에 가고 싶은 마음에 회사에 통 보하고 무작정 떠났다. 우연히 떠난 볼로냐에 운명이 기다리고 있 을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볼로냐 아동도서 박람회장은 코엑스 태평양홀 서른 배쯤 되는 크 기였다.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쩍 벌어진 나는 장내를 가득 채 운 전 세계의 그림책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형색색 그림책의 향 연 앞에서 맥박은 조금씩 빨라졌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 며 더 깊숙이 빠져 들었다. 닷새 동안 온종일 부스를 돌아다니며 그림책을 보고 또 봤다. 최대한 눈과 가슴에 담으려고 애를 썼다. 박람회장 한가운데 키오스크(매점)가 있었는데, 작은 컵에 검은 액체가 참새 눈물만큼 담겨 있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하루수십 잔을 받아마셨다. 피곤한 몸으로 숙소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심장이 벌 렁거리고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10년이 지 난 2000년대에 들어서야 그것이 에스프레소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볼로냐 박람 회 하면, 그림책 세상과 검은 에스프레소의 추억이 떠오른다.


리디아의 정원에서 뛰놀다
1980년대 한국은 50권, 100권짜리 그림책 전집만 있을 뿐 시중 단행본은 두세 권밖 에 없었고 1990년대 들어서야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시대의 흐름에 힘입어 1996년 일산에 어린이서점 ‘동화나라’를 열었다. 어릴 때 못다 이룬 열정이 되살아났고 그림 책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 다. 일산 ‘동화나라’도 서점을 연 지 1년 만에 손님 발길이 뜸해졌다. 그때 그림책 『리 디아의 정원』이 내게로 왔다.

미국의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6년, 리디아는 도시에서 빵집을 하는 외삼촌댁에 맡 겨진다. 검은 콧수염 밑으로 굳게 다문 입술, 웃음의 그림자조차 없는 무뚝뚝한 외삼 촌을 웃게 해드리기 위해 리디아는 버려진 옥상에 꽃밭을 정성스럽게 가꾼다. 그리 고 삼촌에게 깜짝 선물한다. 정원을 본 삼촌이 활짝 웃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 만 삼촌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케이크를 리디아에게 만들어준다. 무심하게 건네지 만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마지막 장, 떠나는 리디아를 꼭 안아주는 삼 촌의 뒷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웃음을 잃은 삼촌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리 디아가 삼촌에게 선물한 정원은 나에게 희망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동화나라에도 봄이 찾아왔다. 동화나라는 단독주택을 개조하여 1층은 서점, 지하1층은 전시, 공연, 모임 공간으로 지역 주민에게 개방했다. 당시에는 이렇다 할 어린이 문화공간이 없어서 많은 학부모가 자녀의 손을 잡고 동화나라를 찾았다. 아 침부터 수십 명이 드나들며 위아래 층에서 동화 읽는 모임 4~5개를 동시에 진행했 다. 인형극, 그림책을 통한 피아노 연주회, 멀티슬라이드 공연, 3천여 명이 모인 호수 공원 야외무대에서 대형스크린에 그림책을 쏜 영상공연, 아이들 작품 발표회 등 다 양한 프로그램을 펼쳤다. 요즘처럼 온라인 홍보 수단이 없었지만, 입소문을 타고 많 은 사람이 모였다. 동화나라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림책에 빠져들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만남과 소통의 아지트였다. 그림책이 아이들의 감수성과 창의력을 자극해서 일까, 놀랍게도 그때 엄마 손 잡고 동화나라를 찾은 아이들 대부분이 실용음악과, 응용미술과, 동·서양화, 문예창작과를 갔다. 그림책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20대의 멋 진 청년이 되어 찾아올 때 큰 보람을 느낀다.


새로운 변신으로 희망을 이어가다
위기는 쉴 새 없이 찾아왔다. 2000년대에 온라인 서점이 등장하며 가격할인에 밀린 어린이서점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지금은 몇 군데 남아 있지 않다. 일산 동화나라 도 만만치 않은 임대료에 머리 싸매던 중, 여러 혜택과 도움을 받아 2004년 파주 헤 이리마을로 이사했다. 특히 일산 동화나라를 사랑해준 많은 분이 후원금을 보내주 셨다. 돌아보면 나 혼자 한 게 하나도 없다.

헤이리에 와서는 다양한 일을 했다. ‘어린이책예술센터 책임연구원’이라는 새로운 직 함을 달고 출판단지에서 2005년 ‘어린이 책잔치’를 시작으로 올해 14년째 어린이책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해 왔다. 동시에 어린이책 아카이브 작업을 시작했다. 곳곳에 흩어진 5만여 권의 어린이책을 모아 아카이브 형태로 보존하는 일이다. 어린이책의 역사를 따라가며 옛 자료를 발견하는 작업은 아주 흥미롭다. 이 작업을 통해 그림책 작가와 교류가 넓어져서 보리출판사 월간지에 ‘정병규가 만난 우리 그림책’ 연재를 시작했다. 3년간 전국의 그림책 작가 37명의 작업실을 찾아 작가의 살아온 이야기,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 1940년대부터 70년 넘는 세월, 우리 그림책의 뿌리와 명맥 을 이어온 37인 작가의 삶과 예술혼은 내 가슴을 울렸다. 그들의 해사한 얼굴과 굴 곡진 삶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물 위로 날아오르는 날치
작가가 작품을 낳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한 작업실에서 작가의 고뇌와 씨름의 흔적을 보았다. “물 위로 날아오르는 극소수의 날치”(이어령 문학평론 가가 예술가를 비유한 말)중 소개하고픈 사람이 있다.

바로 故 장호 작가다. 평생 열정을 그림에 쏟아 붓고 바람처럼 떠난 그의 인생을 들 여다보는 내내 눈시울이 시큰했다. 그는 창작에 대한 열망이 늘 피어오르는 사람이 었다. 무서울 정도로 그림에 집중하고 자면서도 그림을 생각하는 작가였다. 그러나 일 년 내내 작업하여 전시회를 열어도 그림 값을 떼이기 일쑤였고, 최소한의 생계조 차 잇기 어려웠다. 20여 년을 치열한 현장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그는 딸이 책을 보 면서 스스로 글을 깨치는 것을 보고, 딸에게 손수 그려줄 요량으로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그의 일러스트는 점과 선,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그은 것 없이 놀라울 만큼 섬세하다. 따뜻하고 눈부신 그의 그림은 작가의 온화한 성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기름지고 풍요로움을 불편해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없는 주머 니 털어서 주변 사람을 챙겼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막상 본 인은 끼니 걱정하며 살았지만, 늘 허허 웃고 있었기에 속사정을 몰랐다. 영혼을 바 쳐 그림을 그린 예술가를 잃은 것과 생전에 그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아직 도 마음 아프다. 그에게 그림이란 무엇이었을까? 물질을 향해 질주하는 세상을 거슬러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정진하던 그는 흡사 구도자와 같았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서
중·고등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그림책 특강을 했다. 맨 뒤에 50대 후반 유도 선생님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자세 로 앉아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나그 네의 옷을 벗기듯 나도 그림책의 따스 함으로 선생님 마음의 빗장을 풀고자 그림책을 활짝 펼쳐서 읽어드렸다. 뚱 한 얼굴이었던 그는 시간이 지나며 눈 빛이 바뀌었다. 특강이 끝날 무렵 그 는 “이 나이에 그림책을 보리라곤 생 각 못 했습니다. 훗날 손자 손녀에게 읽어주고, 나도 계속 읽고 싶습니다” 라고 했다.

우리는 저마다 꿈꾸는 것이 있다. 한 때 품었지만 잊고 살아온 꿈이 우리 안에 잠들어 있다. 그림책은 그 정서 를 자극하여 잃어버린 꿈과 동심의 불 씨를 되살린다. 그림책은 아이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내가 리디아의 정원을 읽고 새 힘을 얻은 것처럼 어른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

나 역시 꿈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팝업북, 동화책 등을 가져와서 서로 공유하고 즐기고 이야기하는 장 을 만드는 것. 사람들이 그림책을 통 해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세상과 삶을 아름답게 가꾸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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