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홈회원가입고객센터사이트맵English
전체 980px
left - 204px
center - width:460px;margin-left:10px;
right - width:296px;margin-left:10px

회원가입
아이디/패스워드 찾기

지식센터

HOME 지식센터 월간아버지
지식센터 > 월간아버지
통일 한나라를 꿈꾼다
작성자 송현영 작성일시 2018-05-25 12:18:25.0 조회수 180 연월 201805

 

통일
한 나라를 꿈꾼다

심구섭 | 남북이산가족협회 회장
취재, 글 : 송현영 ​ / 사진 : 김승범



천륜이라고 했다. 하늘이 맺어 준 부모 자식의 연은 끊을 수 없다는데, 나라가 쪼개지며 부모 형제와 생이별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산가족이다. 이산가족의 한을 품고, 70년전 그들이 지키지 못한 ‘다녀오겠습니다’ 그 한마디 약속을 이어주는 사람, (사)남북이산가족찾기협회 심구섭 회장을 만났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천륜을 확인하며 몸부림치는 이산가족의 곁을 지키게 했다.


아! 나의 어머니
내 나이 팔순을 넘어 백발이 성성하지만 눈감으면 아직도 정갈하게 이마를 드러낸 젊으신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열네 살, 교복을 입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손 흔들고 뒤돌아선 것이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길로 어머니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영영 이별이었다. 함경남도 정평군이 고향인 나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 기자셨다. 요새로 치면 특종을 많이 보도해서 이름을 날리셨는데 1945년 해방 후에 북한에서 반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월남하셨다. 1년 후 강릉에 자리를 잡으신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구섭이를 내려보내라.” 1947년 고향 집에 할머니와 남동생을 두고, 나는 어머니, 5살 여동생과 함께 아버지 집에 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웬 여자가 있었다. 대뜸 우리에게 누구냐고 묻자, 눈치 빠른 어머니는 ‘심상열(아버지) 선생님 아들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라고 둘러댔다. 연락을 받고 오신 아버지가 그 분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와 어정쩡하게 악수를 했다. 몹시도 어색한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어머니는 아버지 집에 있지 못하시고 다른 곳에 계시다가 3일 후 고향 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헤어지던 날, 나는 새 교복에 모자를 쓰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손을 흔들고 집을 나섰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집에 왔더니 어머니와 여동생은 북으로 가고 보이지 않았다. 남한 집은 어머니의 자리가 없었다. 그때 어머니의 억장이 얼마나 무너지셨을까? 시인 모윤숙의 동창, 영생여고 출신의 지식층 여성으로서 자존심이 얼마나 무너졌을까? 무척이나 가슴 아픈 귀향길이었을 것이다.


피맺힌 아버지의 당부
38선은 가로 막았으나 서신 왕래는 가능했기에 편지로 한동안 어머니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38 따라지’라는 놀림을 받았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1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그해 여름 6 .25한국전쟁이 터졌다. 불바다로 변했다는 고향 집이 궁금해서 학도병으로 참전해 근처까지 갔지만, 끝내 어머니를 뵙지 못 하고 부대를 따라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에서 결혼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어느 날, 미국의 지인을 통해 조선일보 기자였던 아버지 이름을 대며 아들인 나를 찾는다는 편지를 받았다. 너무 놀라서 경황이 없었지만 떨리는 손으로 겨우 어머니께 편지를 써서 전했다. 3개월 후에 북의 남동생한테서 답장이 왔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여동생과 북에서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이 막막하고 가슴이 아파서 한참을 통곡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무지막지한 공산정권 아래서 어찌 사셨는지, 마지막 가신 길이 듣고 싶었다. 1년간 수소문 끝에 1994년, 47년 만에 남동생과 중국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공항 저편 에서 남동생이 들어오며 “형님” 하고 부르는데, 가슴이 터지는 듯했다. 나와 닮은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동생을 껴안고 사방이 떠나가라 통곡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 이름을 부르셨다는 어머니, 어머니의 현명함 덕분에 두 동생은 대학을 나와 잘살고 있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는 몸이 편찮으셔서 20여 분짜리 음성메시지를 남동생에게 보내셨다. “이아비의 말을 잘 들어라. 부디 너희 남매는 그 곳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하셨다. 아비로서 해줄 것은 없고 두 동생이 부디 잘 살아남기를 바라는 진한 부정(父情) 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94세에 돌아가셨다. 동생을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4년이 속수무책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한평생 내가 모셨지만, 어머니께 밥 한 끼 못 해 드리고 손 한번 잡아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돈을 보내 어머니 묘소에 비석을 세워드리고, “큰아들 구섭이가 세웠습니다”라고 새겼다.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바래지 않는다.

사무치는 이산가족의 한
동생을 만난 후, 통일부에서 찾아와 ‘남북이산가족협회’ 운영을 맡아달라고 했다. 1998년, 사업을 접고 이산가족으로서 정부가 미처 손쓰지 못 하는 일을 찾아 전력을 다했다. 남북이산협회에서는 이산가족의 교류, 생사 확인, 편지 왕래 등을 돕고, 북한에 있는 이산가족에게 물품 전달하는 일을 주로 한다. 한동안은 1년에 20~30명씩 연결해 주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점점 어려워지고 무엇보다 고령자가 많이 돌아가셔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현재 등록 이산가족 13만 명 중에서 7만3천 명이 돌아가시고 5만8천 명이 남았다. 그 중 90세 이상이 약 1만 명 정도 된다.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근래에는 중국을 통해 북한 가족의 편지 받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대신 북한 가족과 남한 가족이 북한 과 중국 국경 근처에서 약 1시간동안 통화하도록 주선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전화 상봉이지만 70년 만에 피붙이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는 것이다. 남한 가족은 수화기 너머 북의 가족과 인적사항을 확인한 후에 큰 소리로 울고불고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기막힌 사연이 구구절절하니, 지켜보는 사람도 같이 울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때 반공포로로 남한에 남은 한 남성은, 죽기 전에 북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와 중국의 접선 장소에 당도하니 어머니가 아닌 조카가 있었다. 조카는 “할머니가 날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가서 삼촌을 기다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했다. 인민군으로 끌려간 아들이 살아오기만 바라던 어머니는 전사통지서가 오지 않자 죽는 날까지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94세셨던 나의 은사님은 처자식과 통화하러 중국까지 갔는데 딸(69세)만 나왔다. 아버지를 만난 딸은 오열하며 모친의 사망 소식을 알렸고 부녀의 가슴 아픈 해후에 모두 흐느꼈다. 칠순이 다 된 딸이 기억도 희미한 구순 넘은 아버지의 목소리 듣겠다고 함경도에서 신의주로 3일간 기차를 타고 왔다. 전력이 딸려서 수시로 기차가 멈춰 서는 바람에 3일 밤낮 죽을 고생을 하며 온 것이다. 아버지는 눈물을 참고 “이 아비가 죽기 전에 꼭 돈을 보내줄 테니 앞으로 만나러 오지 마라” 당부했다. 늙은 딸이 고초를 겪을까봐 딸을 위해 돌아서는 선생님의 쓸쓸한 뒷모습에 가슴이 저몄다.

죽기 전에 만나게 해 주오
압록강 건너편에 어머님 묘소가 있던 분은 북의 동생에게 모친의 묘소 앞에서 깃발을 흔들라고 했다. 폭 50m도 안 되는 압록강 상류에서는 북한이 잘 보였다. 저 멀리 빨간 깃발이 보이자, 이분은 아들과 함께 차례상을 차리고 깃발을 향해 절을 올렸다. “어머니, 아들 인사드립니다.” 엎드린 채 애통해하는 부자를 보며, 나도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산가족의 뼈저린 사연을 남기려고 매번 현장에서 통화 내용을 녹음하고 사진을 찍는다. 몇십 년 만에 재회한 피붙이에게, 비통하고 애끓는 감정을 누르며 “고향 집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어요?”라고 물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이 일을 하다가 중국 공안에 두 번 잡히고, 5년 동안 중국 비자발급이 불허된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나라고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러나 두려움과 비교할 수 없는 보람과 감동이 있다. 살점이 떨어지듯 고통스러운 이산가족의 아픔을 잘 알기에 모른 척할 수가 없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결국 나를 살리는 일이다. 가장 큰 아픔이 인생 사명이 되었다. 누누이 언론을 통해 말했지만 남북한의 위정자들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고령자를 위해 속히 엽서라도 주고받게 해주길 바란다. 90세 이상 고령자 가족의 생사 확인부터 시켜주는 것, 이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까까머리였던 나 역시 백발이 되도록 어머니께 밥 한 끼 대접하지 못해서 많이 울었다.
어머니 묘소에 절하고 여동생을 만나고 싶다. “오빠 무릎 위에서 재롱부리던 제가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여동생이 쓴 편지를 읽으면 늘 가슴이 아프다. 여동생의 머리 한번 쓰다듬고, 손 한번 잡아보는 것이 소원이다. 비단 이 소원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남북한 이산가족의 마음일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열어가자
우리 세대가 다 힘들게 살았지만 전쟁 통에 월남한 사람들은 정말 힘들고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소련 군정, 김일성 독재, 6.25한국전쟁, 군부독재 등…. 대한민국의 역사적 질곡을 온몸으로 겪으며 가족이 헤어지고 터전을 잃었다. 힘들어도 삶의 의욕을 다지며 엄혹한 세월을 견딘 것은 북의 가족을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나도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 꿋꿋이 살았고 나름 성공해 일가를 이뤘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풍요는 북한의 가족을 도우라고 얻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이 상태로 사는 게 편하다며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접할 때는 아쉽고 안타깝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무수하다. 속히 보고 싶은 가족과 만나서 과거를 더듬기보다 미래를 이야기하도록 하자.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역사는 응전과 도전의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역사의 숙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닌, 잘못된 역사는 바로잡는 것이 국민 된 도리다. 부끄러운 과거라고 부정하면 발전적인 미래는 올 수 없다. 6.25전쟁 세대의 특별한 경험이나 소원으로 치부하지 말고, 젊은 세대가 좀 더 관심을 두고 넓은 시야로 보기 바란다. 북에서 내려와 동고동락했던 친구들도 하나둘 떠나고 나 역시 저물어간다. 내일 일을 알 수 없어서, 시신기증서를 품 안에 지니고 다닌다. 언제 쓰러지더라도 아쉬움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남은 생의 목표다. 힘이 남아있는 한, 한 사람 이라도 더 고향 가족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분단 조국이 아닌 통일, 하나의 나라를 보고 싶다.

 

목록
아버지학교소개 후원안내 지역지부장 오시는길 고객센터 사이트맵 이메일 무단 수집거부
페이스북 트위터
우 06752 서울시 서초구 바우뫼로 27길 7-11 6층(양재동 70-2 대송빌딩 4층)      대표전화 02)2182-9100      Fax. 02)529-9230
Copyright © 1995-2008 (사) 두란노아버지학교운동본부. All rights reserved.father@father.or.kr
두란노아버지학교운동본부
[/cms/board/jsp/zine/read.jsp]
gConfig.imageSvr=[] sessionScope.user.level=[10]
servlet_path=[/board/read.action]
queryString=[id=zine&sm=060300&no=5525]
queryString=[id=zine&sm=060300&no=5525;jsessionid=E6071DFED3ACC93CD97C29BF862013FA]
[%2Fboard%2Fread.action%3Fid%3Dzine%26sm%3D060300%26no%3D5525]
jsp=[/cms/board/jsp/zine/read.jsp]
CONTEXT_PATH=[]
admin_page=[false]
sessionScope.user.userid=[]

T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