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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씨앗의 꿈을 찾아
작성자 송현영 작성일시 2018-03-13 17:06:11.0 조회수 260 연월 201803

우리 씨앗의
꿈을 찾아


안완식 | 한국토종연구소장
취재 글 송현영 / 사진 김승범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하지”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의 일부다. 청춘은 나이나 용모가 아닌 꿈을 향한 열정과 의지, 마음가짐이라는 의미를 일깨운다 .
토종 씨앗 연구가, 토종 지킴이로 이름난 안완식 박사는 국내 종자은행의 설립을 주도하고 40여 년 동안 우리 토종의 우수성과 종자 산업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우리 땅의 토종 씨앗을 찾아 아직도 전국을 누빈다는 그의 얼굴에 청춘의 생기가 넘쳤다.

토종 씨앗을 지켜라
오래전부터 우리 땅에서 자란 토종은 본연의 맛과 향기를 담고 있어 우리 몸에 이롭다.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기본 의식주였던 토종의 중요성과 우수성은 거듭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산골이나 농촌, 시장에서 점점 우리 토종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유기농과 친환경 농업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이때 농약 없이 우리 땅에서 적응한 토종을 지키는 것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종자 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계 여러 나라는 자국 종자를 보호하고 새 종자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유일무이한 우리 자원, 토종이 사라지면 영원히 복구할 수 없다. 생명공학, 신품종육종, 생물학 등 여러 연구의 기본 자료인 유전자원으로 토종 씨앗을 지키는 일은 다국적 회사가 한국 종자 시장을 장악한 현실에 맞설 유일한 대안이다.
세계적인 종자 기업에 농부들이 치르는 막대한 비용을 생각할 때, 토종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면 엄청난 손해를 본다고 열심히 알리고 있는데, 아직도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녹색혁명의 주인공 앉은뱅이 밀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심고 돌보는 게 참 좋았다. 중·고교에서 원예반 활동을 할 정도였으니 농과대학을 선택한 것이 당연했고 군대에서도 늘 식물을 돌보았다. 마지막 휴가 때 입사 시험 치르고 발령받은 곳이 농촌진흥청이었다. 당시 밀 보리 육종 분야에서 교배품종 관리를 하다 멕시코의 국제옥수수밀연구소(CIMMYT)에서 1년간 연수받을 기회를 얻었다. 그때 미국인 육종학자 보로그(N. E. Borlaug) 박사 밑에서 배웠는데, 그는 1970년 농학자로서는 세계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가 개량한 ‘소노라 밀’이1960년대 멕시코, 인도, 파키스탄 등의 기아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굶주림을 해결해 ‘녹색혁명’을 불러온 이 소노라 밀은 바로 우리나라 토종 ‘앉은뱅이 밀’에서 탄생했다. 앉은뱅이 밀은 키가 작아 바람에도 잘 쓰러지지 않고 이삭이 튼튼해 수확량이 기존 밀보다 3배나 많다. 우리 토종이 일본, 미국으로 흘러가 신품종 씨앗으로 재창조되었지만, 우리 것이라 할 수 없으니 안타까웠다.



소리 없는 종자 전쟁
귀국 후 밀 육종 연구를 계속하다가 1983년 일본 유전자원연구소에서 공부할 때 세계적으로 유전자원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선진국의 유전자원 조작기술이 퍼지면서 지적 재산권의 근원이 되는 유전자원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연구원들 역시 자기 나라 토종 씨앗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1985년 농촌진흥청 본청으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유전자원에 몰두하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씨앗을 잘 모을까 고심하다가 농촌진흥청의 지도소 소속 8천여 명의 공무원들에게 일일이 공문을 보내 현지에서 토종 씨앗을 수집하여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나대로 직접 지방으로 다니며 토종 종자를 모았는데 첫해 거둔 종자가 5,100여 점 정도였다. 미국 일본 중국을 비롯한 외국과 유전자원 교류와 도입에 힘을 기울였다. 남미 볼리비아, 네팔, 러시아 연해주 등지를 돌며 현지 수집을 수행했다. 2002년 퇴직할 때까지 15만여 점을 보유했는데 토종은 3만 3천 점이었다. 한편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시설을 지어 종자를 안전하게 보존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1986년에는 미국, 영국, 일본, 스웨덴 등 선진국의 종자 저장 시설을 시찰, 조사하고 장점만을 뽑아 설계했다. 1988년 국내 최초 20만 점 보존 규모의 유전자원인 종자보존시설을 농업진흥청 본청 경내에 신축하였다. 당시 미국 CNN TV 방송국 기자와 인터뷰도 했는데, 방송 소식은 그 해 크리스마스에 아르헨티나의 일본인 친구가 방송을 보았다고 인사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아보고 나서야 알았다. 현재는 많은 발전이 있어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에 50만여 점 규모의 유전자원 보존을 위한 종자보존 시설이 수원과 전주 두 군데에 있다.

한 알의 씨앗이 지닌 가치
우리 땅에서만 나는 분홍 감자, 어금니동부, 강원도 약콩, 붉은 수수, 그저 작은 씨앗 한 톨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조상의 몸을 만든 DNA의 역사가 있다. 토종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땅의 역사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 농촌에서 토종 밀기울로 빚은 막걸리나 밭곡식으로 만든 떡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에서 젊은이가 사라지고 토종 농산물도 정겨운 풍경도 사라져갔다. 1985년에 비하여 7년 후 1992년에는 74%가 사라졌고 14년 후 2000년에는 12%가 사라져 남은 것은 겨우 14%만 남았다. 15년 사이 토종 86%가 사라진 것이다. 곡식도 콩 팥 녹두 정도만 남고 다양한 종류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1985년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토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사람이 뜻을 같이하지만 당시는 일부 농민, 여성 농민회, 토종 연구회 정도만 움직였다. 주말마다 전국을 돌며 씨앗을 모을 때 주변에서 ‘자꾸 토종만 찾아서 뭐할 거냐? 돈도 안 되고 못나서 하찮다. 당장 쓸 수 있는 품종을 만들어야지…’라고 할 때는 참 괴로웠다. 그때마다 “지금은 쓸모없어 보여도 잘 모아두면 후손들이 분명히 요긴하게 쓸 때가 올 거다. 지금 포기하면 영원히 그 씨앗은, 그 역사는 사라지는 거다” 하며 버텼다. 그때 토종 종자를 수집하여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 종자가 우리 땅에 존재했는지조차 몰랐을 텐데, 두고두고 뿌듯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식량 주권 없이는 미래도 없다
토종 무인 진주대평무는 단단하고 아삭한 식감이 더할 나위없지만 지금은 몇 가구만 남았다. 앉은뱅이 밀은 세계 슬로푸드 국제기구가 진행하는 전통음식 문화보전 프로젝트인 ‘맛의 방주’에 등재되면서 관심을 얻고 재배 면적 역시 넓어졌지만 아직은 소비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2002년 퇴임 후에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종자』를 출간하고 2008년에 토종 종자를 지키는 모임 ‘씨드림’을 만들어 계속 토종 종자를 수집했다. 해마다 방문할 지역을 시·군 단위로 정하고 회원들과 팀을 이뤄 농가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씨드림’은 우리말로
‘씨를 드린다’는 의미도 있고 ‘씨앗의 꿈’처럼 농민의 꿈이 씨드림을 통해 이뤄진다는 뜻도 있다. 전국 지부를 통해 토종이나 전통농사법 정보도 교환하고 해마다 3월 회원들이 직접 증식한 토종 종자를 나눠주고 있다.
결국 토종을 지키는 것은 식량 주권의 문제다. 식량 주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 작은 씨앗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홍수나 지진 같은 재해로 사라진다면 씨앗 증식하는 데만 10여 년은 걸린다. 외환위기 당시 종묘회사 대부분이 외국계 기업에 팔렸고 지금 농민들이 사다 심는 종자들 대부분은 외국 기업의 소유다. 일명 ‘터미네이터 씨앗’이라 불리는 일부 종자는 유전 처리를 해서 다음 해에 씨앗을 받아 쓸 수 없다.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인 다국적 기업의 1회성 종자를 해마다 사서 농사를 지으니 그 주권은 누구의 것인가? 그나마 귀농 귀촌 젊은이 중에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토종에 관심 두고 명맥을 이으려 하지만 아직 극소수라서 매우 안타깝다.

수인사 대천명

평소, 사람의 도리를 다 지키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수인사 대천명(修人事 待天命)’을 좌우명으로 품고 산다.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내가 열심히 받아 둔 토종 씨앗을 후손들이 번창시키도록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나의 도리다. 2007년 『내 손으로 받는 우리 종자』(들녘) 2009년 『한국토종작물자원도감』(이유)를 출간했는데, 토종 작물 자원의 방대한 내용을 담았다. 아내와 전국에 널린 우리 매화 350여 종을 조사한 뒤, 100년 이상 된 고매화 250여 가지를 2011년 『우리 매화의 모든 것』(눌와)에 소개했다. 퇴직 후 15년 동안 사비를 털어 발품을 팔던 그 길에 아내가 동행했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서너 차례씩 방문할 수 있었을까? 드러내놓고 고마움을 표현하진 못하고 책 한편에 아내의 사진을 조그맣게 넣어 애정을 표현했다. 요즘은 아내와 날마다 탁구를 즐기는데, 가끔 이럴 때가 아니라 더 연구하고 더 많은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든다. 그때마다 아내는 건강도 챙겨야 더 오래 갈 수 있다며 다독인다. 문득 테라스의 매화를 보며 내가 찾아다닌 우리 강산의 토종이 곳곳에 만개할 날을 그려본다. 팔순을 앞둔 지금도 할 일이 남았으니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고 순간순간이 행복하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정한 내 인생의 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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