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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랑의 언어에서 배우다
작성자 김문영 작성일시 2018-01-26 19:08:36.0 조회수 531 연월 201801


그리스, 사랑의 언어에서

배우다

기획 글 김문영




영화는 ‘또 다른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거기서 새 지평을 여는 감각이 깨어난다. 우리가 영화의 색다른 감각을 통해 ‘세계사’를 들여다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 감독/주연의 그리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는 한 가족의 비극이 어떻게 그리스 경제위기와 유럽연합, 난민사태, 극우 파시즘과 얽혀 있는지 보여준다. 시각문화비평 및 예술관련 기획자로 활동하는 천수림 디렉터와 함께 ‘영화로 세계사 읽기’를 시작한다.

<나의 사랑, 그리스>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했지만, 원제는 그리스어로 <Enas Allos Kosmos 또 다른 세계>다. ‘또 다른 세계’의 의미는 겹치거나 포개어져 읽힌다. 영화 배경인 그리스 바깥의 시리아, 독일, 스웨덴 같은 나라 혹은 개개인이 대면하는 역사로서 ‘또 다른 세계’ 그리고 나를 둘러싼 ‘타자’의 모습이다. 이어 “개인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여 ‘개인의 고통에서 국가의 고통을 보고, 국가의 고통에서 개인의 고통’을 목도한다. 집단과 개인이 달라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연대성’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태피스트리, 직조 방식의 영화 읽기
영화는 세 커플(20대, 40대, 60대)이 ‘난민사태, 이민자 차별, 외국인 혐오, 실업난, 구조조정’이라는 장애물에 부딪히면서 겪는 이야기에 고대신화의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단순하게는 옴니버스 영화지만,전체 그림을 보려면 ‘태피스트리(tapestry 여러 색실로 그림을 씨줄과 날줄로 짜 넣은 직물)’를 연상할 수 있다. 직조 방식으로 짜 놓은 영화의 날줄은 2015년 그리스가 디볼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시기,한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다. 씨줄로는 고대 역사에서 현재까지 그리스를 훑어보며 ‘왜 그리스가 유럽에서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모든 유럽인은 그리스인”이라 했다. ‘유럽문화의 발상지인 그리스를 빼면 유럽은 없다’는 의식이 유럽인 기저에 깔려있으나 현재 그리스는 남유럽의 가난한 나라에 불과하며 안팎으로 어지러운 상태다. 이런 위태로운 현실과 의식의 부조화를 넘어서 ‘에로스, 사랑의 신화’가 새로운 얼굴로 등장한다.


부메랑 그리스인 여대생 다프네는 밤길에 괴한의 습격에서 시리아 청년 파리스의 도움을 받는다. 우연히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들의 순수한 사랑은 이민자를 ‘기생충’ ‘쓰레기’라 혐오하며 그리스에서 모조리 추방하겠다고 나선 파시스트의 폭력사태로 비극을 맞는다. 다프네는 폭동을 주도한 아버지와 마주치고… 결국 다른 민족을 향한 아버지의 분노와 폭력은 다프네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사랑의 신화가 우리에게 현현하다
시리아 난민 파리스와 그리스인 다프네의 사랑은 고대 ‘에로스와 프쉬케’의 신화를 재해석했다. 그리스인은 신들을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보려 했고, 신들에게 인간의 모습을 투영하기도 했다. 영화는 신들의 세계와 인간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그리스문화의 독특한 결을 느끼게 한다.
파리스가 다프네에게 “정치가 사람들을 둘로 나눠요”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끌어안는다. 사랑이 정점에 이를 때, 긴가민가하게 ‘봄을 맞아 풍작을 비는 축제’인 사육제 행렬이 지나간다. 영화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공간 이미지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본래 신화와 달리, 다프네와 파리스의 사랑은 다프네가 죽임을 당하면서 비극으로 끝난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삶을 성찰한다. 죽음과 같은 고통이 아니면, ‘진정 내가 누구인지’ 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은 ‘너 자신을 알라’는 부름인 동시에
‘정화(카타르시스)’ 장치다. 딸의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아버지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나?”라는 자각에 이른다. 다프네는 가족의 갈등, 민족과 국가 간 첨예한 갈등 그리고 사랑의 가능성이 집결된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아버지가 증오하던 적(이민자)이 아니라 자기 편 조직원의 총에 맞았으니 더 끔찍한 일이다.


로세프트 500mg 40대 직장인 지오르고는 로세프트(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치료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생활의 무게를 지탱하기 어렵다. 스웨덴의 엘리트 여성 엘리제가 아테네에 온다. 그녀가 공항 도착 알림 방송과 함께 무심코 에로스 신화 기사가 실린 잡지를 펼쳐본다. 이어 어느 바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서로에게 끌려 하룻밤을 보낸 후 점점 사랑에 빠지지만, 엘리제는 지오르고가 매각회사의 직원인 것을 알고 고민이 깊어진다. 본사는 엘리제에게 감원 35% 목표달성을 압박하고, 명단에 오른 지오르고 차례가 다가오는데….


탐욕의 언어가 인류를 잠식한다
영화 속 비극은 오히려 희망에 가깝다. 실제 그리스는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몰려드는 ‘난민 환승국’으로 분쟁과 갈등이 심각한데, 시리아 난민이 압도적이다. 2010년 말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아랍의 봄(반정부 민주화 시위의 통칭)’의 영향으로 시리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2012년 국제사회가 시리아 내전 상황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7년 동안 시리아 인구의 절반인 1천만여 명이 난민이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와 이란 등은 시리아 정부를, 미국과 서방연합군, 사우디는 반정부군을 지원하는 등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시리아 내전을 정치, 경제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성찰에 무능력하고, 탐욕의 언어에 물든 국가는 개인뿐 아니라 인류를 잠식한다.

한 나라의 문제가 전 세계에 얽혀있다
유럽연합 총위원장이 “유럽연합에는 유럽도 없고 연합도 없다”라고 할 만큼 유럽의 ‘통합’은 쉽지 않다. 유럽이 금융 재정위기로 휘청할 때 적자가 심했던 그리스가 2015년 디볼트를 선언하면서 유로존 탈퇴(그렉시트) 의사를 밝혔다. 당시 그리스 부채가 413조였다니 유럽연합 쪽에서는 괘씸하면서도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아예 제명하고(그렉아웃)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리스에 긴축재정을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제안했지만, 아직도 문제의 고리를 풀지 못하였다.
‘지오르고와 엘리제의 이야기’는 바로 그리스와 유럽연합의 분쟁과 갈등 관계를 반영하기에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서로를 원해도 현실이 버거운 그들에게 장애물이 너무 크다.
지오르고가 해고당하지 않게 도와달라던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 엘리제의 숙소에서 발코니 창을 연다. 바로 앞, 야외 영화관에서 흑백무성영화 장면이 흐른다. 집단수용소 같은 곳에서 똑같이 허름한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개미 떼처럼 행렬하는 모습이다. 낙천적인 그리스인도 비인간적인 긴축정책에 떠밀려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약육강식의 전쟁터, 교활한 경쟁과 술수가 지배하는 시대의 고통이다. 누군가 죽지 않으면 1밀리리터, 1그램도 변화하지 않는 인간이기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거듭 출몰한다.
우리는 한 나라의 문제가 전 세계의 문제로 얽힌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스의 경제 위기가 그리스만의 위기로 끝나지 않으며, 시리아 내전이 시리아의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서로 물고 물리다 보면 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나와 너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세컨드 찬스 독일에서 온 역사학자 세바스찬은 슈퍼마켓 앞에서 마리아의 도움을 받고, 그 계기로 매주 슈퍼마켓 데이트를 즐긴다. 그리스의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 마리아는 세바스찬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하면서 사랑을 느낀다. 현실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두 번째 기회’를 꿈꾸는 60대 커플 이야기.


내가 행복한 곳이 내 나라다
낭만적 사랑의 완성이 세바스찬과 마리아 60대 커플에서 이루어진다. 은퇴한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세바스찬은 유럽연합에서 큰 힘을 가진 독일 사람이다. 반면 마리아는 그녀 말대로 ‘아주 불쌍한 가정주부’로 생활고에 시달린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알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만나 서로 다른 언어를 배운다. 고대 ‘아고라’는 ‘시장’이면서도 웅변가의 연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누던 공공장소였다. 세바스찬과 마리아는 마치 아고라에 나온 시민 대표단처럼 자신이 처한 처지를 ‘정치적 언어’로 풀어낸다. 슈퍼마켓(아고라)에서 나누는 두 사람(시민)의 아름다운 소통 (정치적 언어)은 새로운 사랑의 역사, 두 번째 기회를 향한 걸음이다.
“내가 행복한 곳이 내 나라다”라는 세바스찬의 말은 그가 역사학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영화 전체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보면 그의 언어는 ‘감독의 언어’요 ‘미래의 언어, 관용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로서 에로스의 신화를 찾아가는 그의 여정은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가지길 바라는 정치적 언어’로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에로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니코스(갈등, 분쟁)와 필로티타(우정, 결합)’의 합성어다. 서로 상반된 의미의 언어가 에로스 안에 모두 들어가 있다. 이것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사랑’만이 문제를 푸는 열쇠라고 명쾌하게 끌고 가는 면이 있다. ‘에로스’ 하면 ‘관능적인, 육체적인 사랑’을 떠올리는데, 에로스 안에 이런 깊은 뜻이 있었다니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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