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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러 가는 길
작성자 이성수 작성일시 2017-11-30 17:53:12.0 조회수 58 연월 201711




용서하러
가는 길

이성수 | 영화 선교사
취재 글 김문영 / 사진 김승범




2014년 4월 프랑스 AFP통신은 “이란에서 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형수를 뺨 한 대로 용서하고 그를 사면해 달라고 진정해 공개 교수형 집행이 정지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피해자 부모는 살인자 바랄의 부친이 유명 축구선수 출신 감독이라서, 여러 단체로부터 ‘피해 보상금을 받고 바랄을 용서하라’는 권유에 시달렸다. 그러나 부부는 이에 맞섰고, 아들의 복수를 위해 교수대 현장에 나타났다. 이슬람 국가에서 행해지는 ‘퀴사스(정당한 복수)’ 규정에 따라 공개처형장에 나온 바랄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살해당한 압둘라 호세인 자데의 부모가 바랄의
발밑에 놓인 의자만 빼버리면 끝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피해자의 어머니가 바랄의 뺨을 한 대 치고 “죄는 밉지만, 너를 용서하겠다”라며 남편과 함께 올가미를 벗겨주었다. 그녀는 “아들이 꿈에 나타나 바랄을 용서해 주라고 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바랄을 용서하라고 했지만,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외치고, 가해자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며 “당신 아들을 용서한다”라고 울부짖었다.
“용서란 무엇일까?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수백 수천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인류는 갈등과 전쟁의 역사로 씻지 못할 상처를 주고받으며 고통에 시달린다. 증오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성수 영화 선교사는 2013년 인류가 풀어야 할 ‘용서와 화해’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뷰티풀 차일드>를 내놓았다. 영화는 19세기 후반 캐나다 정부가 실시한 ‘문화 동화정책’으로 무참하게 유린당하고, 세대를 이어 황폐해진 원주민의 역사를 증언한다. 땅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문화와 관습, 영혼마저 짓밟힌 그들의 못다 한 이야기와 그들 곁에서 치유와 회복을 돕는 한인 선교사들의 헌신이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2017년 가을 ‘서울에서 도쿄까지 용서를 위한 자전거 종주 여행’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는 “여행의 결말을 예상할 수 없지만, 일단 첫걸음을 내딛는다”라며 적신호가 꺼질 줄 모르는 한일 관계가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길 바랐다.

우리 앞에서 울부짖는 역사
20여 년 몸담았던 충무로 영화판을 떠나고, 10년이 지난 후 나의 삶은 달라졌다. 이 땅에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루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영화 선교사’로 살게 된 것이다. 처음엔 예수님의 일대기를 그린 애니메이션 <아들의 노래>를 제작하길 원했으나 한국에서 40억 예산을 끌어오기란 불가능했다. 미국과 캐나다 교회로 방향을 돌려 2010년에만 100개 교회를 다니며 집회를 가졌지만, 결국 <아들의 노래>는 제작하지 못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만나는 선교사님마다 “원주민의 회복을 위한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지역에서는 1년 동안 3천 명 원주민 중에 40명이 자살을 했다. 정부에서 발표하지 않은 자료까지 포함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 원주민들은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며 사회복지나 일자리 등에서 극심한 불평등과 차별을 겪고,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등 생활고를 감당할 수 없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라는데 도대체 누가 그들의 존엄성을 짓밟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새겨 놓았을까? 1492년 콜럼버스가 ‘문명화와 기독교화’라는 두 깃발을 들고 수천 년 전부터 거주하던 원주민 땅을 밟으면서 500년 동안 잔혹한 말살정책이 실행되었고, 그 여파는 끝나지 않았다. 인구학자들이 북미대륙에 원주민이 2천만 명 있었다고 추산하는데, 현재는 500~600만 명으로 늘었다지만, 20세기 초까지는 원주민이 20만 명밖에 안 남았을 정도로 멸종 위기에 이르렀다. 남은 자들은 ‘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제한선’이라는 뜻의 ‘리저브(원주민 보호구역)’에 갇혔다. 실제 원주민 마을에 들어가면 폐허와 무너진 영혼의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강도 만난 이웃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특히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의 문화와 관습을 없애기 위해 실시한 ‘기숙학교’에서 1870년대부터 1996년 폐교될 때까지 일곱 세대에 걸쳐 자행된 폭력은 원주민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 역사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덮어버리고 싶지만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해야 할, 여전히 우리 앞에서 울부짖는 역사다.


© 뷰티풀 차일드, 2013 개봉

거룩한 낭비의 아름다움
그 척박한 땅에 1940년대부터 한국 선교사가 들어가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오랫동안 미주대륙에서 고난의 이민역사를 산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을 소생시키고 있으니 인간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우리 민족이 화해의 중재자로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한인 선교사가 그들과 신뢰관계를 쌓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애를 쓰니 원주민들이 “너희 한국인은 왜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묻기까지 할 정도다. <뷰티풀 차일드>는 그동안 원주민들이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상처와 아픔의 소리를 듣고자 만들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예수님처럼 그들의 고통을 뜨겁게 끌어안는 한인 선교사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2013년 개봉 후 2015년까지 영화를 들고 300여 교회를 다녔다. 캐나다, 미국 백인 교회에서도 영화를 상영하였다. 우리 시대 많은 교회가 영화를 보고 회개하며 새로운 믿음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쓰임받기를 갈망한다. 2015년 3월 ‘뷰티풀 차일드’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기진맥진한 가운데, 선교란 단 한 생명을 구하고자 기꺼이 시간도 버리고 돈도 버리고, 버릴 수 있는 것은 죄다 버리는 ‘거룩한 낭비’임을 깨달았다.

용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길
<뷰티풀 차일드>를 찍을 때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만 용서가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 사이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용서는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면서 “아버지,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들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가해자를 위해 “그가 무엇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그를 양아들로 삼기까지 했다.
물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책임을 지는 일을 낮게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이상의 용서를 끊임없이 지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꼭 ‘그놈’에게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로마인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해서는 무너지고 만다.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보편적 가치가 용납이 안 된다. 세계가 주목하는 앙숙관계 가운데 으뜸이 아닐까 싶은데, 언제 용서와 화해의 역사가 일어날까? 그런 감동의 역사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반드시 그런 날이 오리라 믿으며 그 걸음을 시작한다.

용서하러 가는 길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가장 먼저 철도를 놓기 시작했다. 도쿄에서 오사카를 잇는 도카이도선과 오사카에서 시모노세키를 잇는 산요선, 이 철도선이 부산까지 뱃길로 이어지고, 부산과 서울을 잇는 경부선을 연결해서 아시아를 정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평양, 신의주, 봉천(심양), 하얼빈을 거쳐 중국 본토까지 들어가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엄청난 세월 동안 일본은 수도를 서울로 옮기려고 야심 찬 계획을 했고 한국역사를 왜곡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래서 ‘서울에서 도쿄까지 철로를 따라 용서를 위한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전쟁과 거짓으로 짓밟혔던 2천 킬로미터, 그 길에 새로운 회복이 일어나길 염원하는 땅 밟기다. 종전 72년 전쟁의 상흔이 치유되고,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화해를 소망하며 모든 걸 내려놓고 달리는 길이다. 전체 구간을 지원자 12명이 달리고, 구간별로 참여하는 유명인들은 자기 이름을 내려놓고 힘을 실어줄 것이다. 누구도 돋보이지 않는 길, 오직 일본을 용서하고자 가는 길이다. 용서가 안 되니까 떠나는 여행이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고비가 올 것이다. 페달 굴릴 힘도 떨어지고 날이 갈수록 남루해질 것이다. 마지막 넘어가야 할 경사로 7도에 10킬로미터 죽음의 언덕이라 불리는 하코네 언덕을 오를 때면, 그만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 힘겨운 여정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할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래야만 하지?”
막상 여행이 끝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용서를 못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를 목적으로 출발한다. 부족하고 연약한 이들이 모여서 나아간다. 어떤 방해와 고난이 따를지 추측만 할 뿐 다 알지 못한다. 그저 낙오하는 사람이 없도록 서로 이끌어주고 일으키며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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