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홈회원가입고객센터사이트맵English
left
center
right

회원가입
아이디/패스워드 찾기
HOME 지식센터 월간아버지
지식센터 > 월간아버지
내면의 전사를 삶의 무대로
작성자 강화영 작성일시 2017-10-26 17:11:57.0 조회수 91 연월 201710




독서여행 3
출처 로버트 블라이 『남자의 책 무쇠 한스 이야기』

얼마 뒤 나라가 전쟁에 휘말렸다. 왕은 군대를 불러 모았지만 적은 너
무도 막강했고,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이때 정원사 밑에 있던 소년
이 말했다. “나도 이제 컸으니까 말을 한 필 주시면 전쟁에 나가겠어
요.” 사람들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간 다음 마구간에 가 보렴. 말
한 마리를 남겨 둘 테니까.”

소년은 마구간에 들어가 말을 꺼내 왔다. 그것은 절름발이었다. 절름
발이 말을 타고 어두운 숲으로 들어간 소년은 무쇠 한스를 세 번, 큰
소리로 불렀다. 얼마 뒤 무쇠 한스가 도착했다. “무슨 일이지?” “힘센
싸움말이 필요해요. 전쟁터에 나갈 생각이거든요.” “알았어. 네가 부
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마.” 무쇠 한스는 콧김을 씩씩 뿜어대는
사나운 말과 함께 무장한 전사들을 보냈다. 전사들은 햇빛에 번쩍이
는 칼을 쳐들고 떼 지어 소년에게 왔다.


소년은 새 말에 올라타 전사들을 이끌었다. 전쟁터에 이른 소년과 무
쇠 갑옷을 입은 전사들은 질풍같이 말을 몰아, 닥치는 대로 적을 쓰
러뜨렸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소년은 왕에게로 가지 않고 숲으로 가
더니 무쇠 한스를 불러냈다. “이제 말과 군사를 돌려받으시고 절름발
이 늙은 말을 주세요.” 그리하여 소년은 다시 비루먹은 말을 타고 왕
궁으로 돌아갔다.

왕궁으로 돌아온 왕에게 딸이 나아가 승리를 축하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란다. 이상
한 기사와 전사들이 나타나서 도와주었지.” 왕이 말했다.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던 왕과
공주는 성대한 축제를 열기로 했다.
왕이 딸에게 말했다. “나는 사흘 동안 축제를 열고 너
는 황금 사과를 던지렴. 그럼 신비의 기사가 나타나겠지.” 축제의 개막이 선포되자 소년
은 무쇠 한스에게 “공주가 던질 사과를 받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염려 마라. 벌써 네 손
안에 있다. 그것 말고도 붉은 갑옷과 힘센 말을 주마.”

소년은 붉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축제로 향했다. 공주가 기사들에게 던진 황금 사과
는 소년의 손에 떨어졌다. 하지만 소년은 그대로 말을 몰고 사라져 버렸다. 둘째 날 소년
은 흰 갑옷에 흰 말을 타고 사과를 차지했고,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셋째 날 검은 갑옷에 검은 말을 탄 소년이 다시 사과를 받고 달아나자 왕의 군사들은 뒤
를 쫓기 시작했다.
왕의 군사가 휘두른 칼이 소년의 다리에 상처를 냈고, 말이 껑충 뛰어
오르는 바람에 소년의 투구가 떨어져 자연히 금발이 드러났다.

 

내면의 전사를
삶의 무대로

김경집 인문학자
취재 글 강화영 / 사진 김승범



이야기는 소년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황금 사과 축제에 참여하는 데로 이어진다. 우리 삶 역시 전쟁의 연속이다. 전쟁을 통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전사를 흔들어 깨우고, 삶의 무대에 올라 끝없이 담금질하며 자신을 찾아간다. 그리고 축제에서 춤을 추며 화해와 기쁨을 맛본다. 김경집 인문학자와 함께 소년이 진정한 남자로 성장해가는 6, 7단계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았다.

Q1 소년이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한 여덟 단계 가운에 여섯 번째 이야기입니다. “전쟁에 나가려는 소년이 무쇠 한스에게 말과 무장한 전사를 빌리는” 본문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전쟁이 일어난 왕국 : 전쟁을 물리적인 침략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영혼의 침략’이다. 삶을 직시할 때 내 존재, 본질 자체를 위협하는 가장 구체적인 사건을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의 본성이 어떠냐를 떠나서 나의 존재를 박탈하려는 것은 적이 될 수 있다. 서로 칼을 겨누는 것만이 전쟁은 아니다. 스스로 부패하고 타락하는 것도 전쟁에서 항복과 굴종을 의미한다. “우리는 영혼을 공략해 오는 적이 악의 화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침입자는 물론 혼돈을 초래하지만 우리 영혼의 일부분이기도 하다(254쪽).”
내 본질을 버리거나 타협할 때 우리는 전쟁에서 지고 만다. 내가 어떤 문제와 맞서 싸울 때 혹은 자기 문제에 봉착할 때, 그것이 전쟁, 전투다. 전쟁을 통해 소년은 전사의 길로 들어선다.

한스에게 힘센 말을 빌리다 : 소년은 전쟁이 끝난 후 힘센 말을 한스에게 돌려주고 다시 절름발이 말을 받아온다. 멀쩡한 말은 내 것이 아니라 빌려온 것임을 안다는 이야기다. 내 말이 온전하지 않다는 인식은 오히려 건강하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완전해질 수 없고, 그것을 인정했을 때 인간다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힘센 말을 요청할 수 있을까? 사실 한스는 내 안에 있다. 전쟁에 직면했을 때 내 안의 한스에게 요청해 그 말을 꺼내 와야 한다. 나에게 누군가 블랙리스트를 주면서 시행하라고 할 때, 자기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내 뜻과 상관없이 외부의 힘에 끌려간다. 그것은 전쟁에서 패배를 뜻한다. 내 안의 한스에게 다리 온전한 말을 빌려와서 싸우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할 주체적인 남성성이다.

햇빛에 번쩍이는 전사의 칼 : 저자는 ‘전사의 몰락은 칼의 분실을 뜻한다’고 한다. 칼을 분실했다는 것은 호전성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나를 지킬 가장 본질적인 가치관을 잃었거나 포기한 것이다. 칼은 바로 ‘지혜’다. 지혜는 내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힘이다. 칼은 계속해서 갈라 나가는데, ‘가른다’는 대립과 분별에서 오는 인식, 즉 정의(定義,definition)를 의미한다.
전사의 무기인 칼을 잘 연마하기 위해서는 평생 공부를 해야 한다. 새로운 것이 들어와서 내 의식 구조가 바뀌어야 내 삶이 바뀐다. 공부 없이 살아가면 자신이 아는 몇 가지 교조를 놓고 독단에 빠지고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공부를 통해 정의가 확장하는 과정은 홍역을 앓는 것과 비슷하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틀을 허물거나 깨거나, 이제껏 내가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새로운 지식이 계속해서 들어와야 지혜가 확장된다.
검이 제구실을 할 때, 즉 제대로 정의하고 분별할 수 있을 때, 목숨 걸어야 할 일과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너그러워진다. 그래서 진정으로 강한 전사는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관용은 빛과 어둠, 유한과 무한,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 대립쌍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다.

무쇠 갑옷을 입은 전사들 : 전사는 무쇠 갑옷을 입고 있다. 무쇠는 자신의 경계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단단하고, 옳고 그름이 명확하다. 그런데 전사의 정신을 점점 잃어가는 남자들은 무쇠가 아닌 구리가 되고자 한다. 갈등 속에서 도체(導體), 즉 다리 역할을 하는 데 그친다. 여기서 말하는 구리의 성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가소성, 손으로 조몰락조몰락하면 형태가 변해버린다. 또 하나는 전도성이다. 매개로서 감염되기가 쉽다.
저자는 ‘내면의 전사를 되살리는 것은 구리에서 쇠로 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구리에서 쇠로 간다’는 성숙해가는 단계의 이행을 상징하나, 이런 단순화는 우리 내면에 있는 가치를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 ‘맞아, 내 안에서 구리가 떨어져 나가야 해’라고 생각하면 위험하다. 쇠도 쇠만으로는 힘이 없다. 다른 금속들과 합금이 되고 담금질하고 연마하면서 강해진다.
구리와 쇠는 각각의 역할이 있다. 내 안의 쇠와 구리가 있음을 알고 그 둘을 분별해야 한다. 그런데 두 가지 중 하나를 버리면 그것은 아집이다. 구리와 쇠가 내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Q2 일곱 번째 단계입니다. “축제에 간 소년이 붉은 말, 흰 말, 검은 말을 타고 황금 사과를 받아낸 장면”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황금 사과 축제가 필요한 이유 :
소년은 전쟁터에서 유감없이 자기 실력을 발휘한 후 황금 사과 축제에 참여한다. 왜 그랬을까? 축제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다 같이 즐기는 것이다. 그 공동체에는 다른 사람도 있고, 내 안의 또 다른 나도 있다. 전사로서 나의 존엄성을 지켜내 승리했다면, 축제의 자리로 물러나야 한다. 이 과정이 빠지면 승리감에 취해 일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축제에서는 방어할 필요가 없고, 긴장과 두려움이 사라진다. 즉 자유롭게 춤출 수 있는 자리다. 특히 남성은 공격성에서 해방되기 위해 삶을 어떻게 축제로 이어갈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일평생 의무의 삶을 살았더라도 은퇴하고 나면 자신에게 충실한 ‘권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그런데 이를 배운 적이 없고 경제 상황이나 건강도 따라주지 않는다. 과거의 영광 말고는 자존감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현실을 인식하고 의무에서 벗어나 권리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진짜 승리자는 축제를 한다. 축제를 하기 위해서 내가 맞서 싸웠다. 그런데 싸우고 나서 축제를 할 줄 모르면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 삶의 전반을 놓고 봤을 때 후반부의 축제를 학습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모른다.

성대한 축제의 공간 : 모든 축제의 일정한 형식과 절차는 그 본질, 역사성, 의미와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그릇이다. 그런데 우리가 축제를 따분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축제의 가치와 의미가 빠지고 형식과 절차만을 강요하는 미성숙성 때문이다. 형식적인 면만 강조하다 보면 우리는 축제를 상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축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축제가 가진 가장 큰 의미는 화해다. 그 가치와 본질을 이어나가면 일상에서의 축제가 가능하다.
최소한 머드 축제라도 가서 뒹굴어야 축제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함께 공감하고 희열을 느끼고 나누는 과정도 축제다. 공동의 가치를 나누는 일도 축제의 방식이다. 가정에서, 동창회에서 시 한 편 함께 읽는 시간도 축제다. 고은의 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한 구절이 내 시선, 심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느끼고 나누는 것이다. “축제의 공간에서 전사의 기상은 억눌리거나 무시당하지 않은 채, 미, 희열, 전시,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305쪽).”

가장 먼저 붉은 말을 타다 :
붉은 말, 흰 말, 검은 말은 인간의 성장단계와 같이 일정한 시기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이때 “붉은 색은 전사의 색이다. 붉은 젊은이는 화를 숨기지 않으며 고함을 지르며, 자기 것만을 위해 싸운다(311쪽 참조).” 부모는 아이가 지금 같은 경쟁시대에 자기를 위해 분노하고 고함 지르는 행동을 시간 낭비로 여긴다. 붉은 말은 야생마와 같아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럼 아이가 다칠까 봐 불안해한다. 어른들도 붉은 말을 거쳤고 대부분 살아남았지만, 내 아이에게는 빨리 좋은 것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그 과정을 생략해버린다.의도해서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그렇다. 8살이 되는 순간 입시생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인생의 황금기가 7살이면 끝난다. 그런 상태에서 붉은 말을 언제 타보겠는가. 흰 말이 가치가 있으려면 붉은 말을 타봐야 한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흰 말을 줬다고 착각하지만, 붉은 말을 뛰어넘는 순간 흰 말은 허상이다.

마지막으로 검은 말을 타다 : 검은 색은 ‘하강, 죽음’을 뜻한다. 끝까지 흰 말을 타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검은 말을 타야 할 때는 검은 말을 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겸손이고, 인정이다.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으로 본다면 슬프지만, 검은 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검은색을 만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악당, 공산주의자, 마녀, 독재자 등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늘을 자기 안에서 끌어낸다는 뜻이다(314쪽).” 자신의 그늘을 보려면 해를 등지거나 뒤돌아봐야 한다. 젊어서 해를 향해 나아갈 때는 보이지 않는다. 나이듦은 내 그늘을 보는 과정이다. 내 일부인 그늘을 볼 때 나와 화해한다. 우리는 과거를 이상화하거나 분칠해서 위로받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내가 지나온 시간을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화해할 수 있어야 내 삶을 채울 수 있다. 그럴 때 진정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상처를 낸 병사들 : 검은 말을 탄 소년에게 병사들이 상처를 입힌다. 상처를 내는 사람은 젊은 병사들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시인 조병화 식으로 말하면 다음 세대를 위해 의자를 비워준다는 뜻이다.
무쇠 한스의 역할을 하려면 다음 세대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모범을 보일지 생각해야 한다. 의무의 삶이 끝나가고 있다면, 다음 세대를 위해 싸울 것은 싸워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역할, 윗세대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런 공동 가치 속에서 각자가 내 안의 한스를 어떤 식으로 만날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목록
아버지학교소개 후원안내 지역지부장 오시는길 고객센터 사이트맵 이메일 무단 수집거부
페이스북 트위터
우 06752 서울시 서초구 바우뫼로 27길 7-11 6층(양재동 70-2 대송빌딩 4층)      대표전화 02)2182-9100      Fax. 02)529-9230
Copyright © 1995-2008 (사) 두란노아버지학교운동본부. All rights reserved.father@father.or.kr
두란노아버지학교운동본부
[/cms/board/jsp/zine/read.jsp]
gConfig.imageSvr=[] sessionScope.user.level=[10]
servlet_path=[/board/read.action]
queryString=[id=zine&sm=060300&no=5368]
queryString=[id=zine&sm=060300&no=5368;jsessionid=AD6D4FD58AC9041AE5FC5051CEF62A52]
[%2Fboard%2Fread.action%3Fid%3Dzine%26sm%3D060300%26no%3D5368]
jsp=[/cms/board/jsp/zine/read.jsp]
CONTEXT_PATH=[]
admin_page=[false]
sessionScope.user.userid=[]

T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