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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다 굽쇼?
작성자 강화영 작성일시 2017-09-25 14:18:18.0 조회수 138 연월 201709




뻔하다
굽쇼?

너무나 익숙한 물건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
뻔한 물건의 뻔하지 않은 사연을 소개합니다.


정리 강화영
출처 김지룡·갈릴레오 SNC 『사물의 민낯』
애플북스 | 그레그 제너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와이즈베리



치약
오줌보다 깨끗하게
현대인의 생활필수품 치약, 고대 이집트에서는 황소의 발굽, 수액, 구워서 부순 달걀 껍데기, 화산재 등을 조합해 치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치약을 손으로 직접 문지르는 것이 최초의 양치법이었죠. 1세기경 로마 의사들은 치아 건강보다 미백에 더 관심 두는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소변으로 양치질하면 치아가 하얘진다. 그뿐만 아니라 잇몸에 이를 더 단단히 고착시키는 효과도 있다”는 처방을 내놓습니다. 이 엽기적인 방법이 유행이 되더니, 포르투갈인의 오줌이 보통 오줌보다 더 진해서 미백 효과가 뛰어나다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로마의 상류층 여인들은 포르투갈 산 소변을 비싼 값에 샀다고 합니다.
화학과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돌가루나 도자기를 으깬 가루로 만든 치약이라 이를 마모시켜 오히려 치아 건강에 해로웠습니다. 1873년 현대적인 치약이 대량생산되었지만, 가루 형태였기 때문에 쉽게 눅눅해져 보관이 힘들었고 역시 부유층에게만 허락됐다고 합니다.
1892년에야 젤 형태로 튜브에 치약을 넣어 보관할 수 있게 되고 점차 가격이 낮아져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면도기
수많은 상처와 고민의 역사
머리털, 눈썹 외의 모든 털을 혐오한 고대 로마인들은 수염을 민 얼굴을 계급과 자본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당시는 거울과 예리한 칼이 귀해 스스로 수염을 깎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노예나 이발사에게 면도를 맡겼습니다. 면도 크림은커녕 비누도 없던 시절이니 아무리 숙련된 이발사라도 여기저기 베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족집게로 털을 뽑기도 했는데, 유명한 철학자이자 웅변가인 세네카는 그의 문헌에 로마인의 공중목욕탕에서는 털 뽑는 신음소리가 시끄럽다고 적을 정도였습니다.
1880년 독일인 캄페 형제가 지금과 같은 ‘스타 면도기’를 발명했지만, 아쉽게도 쓰다보면 칼날이 무뎌져 얼굴을 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면도기가 꽤 고가여서 남성들은 상처를 감수하며 사용했는데, 미국인 질레트가 면도날을 교체하는 탈착형 면도기를 만들어 일대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스타 면도기 애용자였던 질레트가 개선책을 찾다 안전면도기를 발명했고, 덕분에 남성들은 면도하다 피를 보는 일도 덜해졌습니다. 그 후 은퇴한 미 육군 대령 제이콥 쉬크가 전기면도기를 발명해 더욱 편리해졌습니다. 그가 물이 얼어서 수염을 깎을 수 없자 물 없이도 면도할 방법을 생각하다 고안한 것입니다. “100% 안전한 면도기는 없지만, 지금처럼 면도의 고통과 번거로움을 덜기까지 수많은 이의 상처와 고민의 역사가 있었답니다.”

포크
사악한 쇳덩어리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식기, 포크의 역사는 채 400여 년이 되지 않습니다. 11세기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에서 끝이 두 갈래로 나뉜 소형 포크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포크는 곧 악마의 무기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신의 은총인 음식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은 신이 만들어주신 인간의 손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포크는 마녀가 만들어낸 도구이며, 이교도 신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들고 있는 삼지창의 무기이자 로마 시대 검투사의 무기가 축소된 형태로 여겨졌습니다. “중세 유럽인들은 이런 도구가 신성한 식탁에 올라온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포크가 식사 도구로 당당하게 등장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 때부터입니다. 이전부터 프랑스의 귀부인들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포크에 호감을 보였고, 신분의 상징이자 사치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귀족들은 상아나 금, 은으로 포크를 만들고 각종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며 재력과 신분을 과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게 됩니다. 신분 자체를 잃어버린 귀족들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사치품인 포크를 악착같이 사용하며 자신의 신분을 증명했다고 합니다.

통조림
꺼내는 게 더 문제
나폴레옹은 전쟁터에 있는 군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안전한 식량을 보급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집니다. 1795년 상금을 내걸고 해결책을 제시할 전문가를 모집했고 15년 후인 1810년에 니콜라스 아페르트라는 요리사가 유리병조림을 만듭니다. 그러나 병조림은 내부 압력이 높아 터지는 사고가 종종 일어났고, 바닥에 떨어뜨리는 순간 깨지기 일쑤였으며, 뚜껑을 열기가 어려워 전투용 식량으로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병조림을 목격하고 더 가볍고 튼튼한 보존 용기를 개발하겠다는 투지로 마침내 양철 통조림을 탄생시킵니다. 그런데 음식 보존 기능에만 관심을 쏟은 나머지 깡통에서 음식을 꺼내는 문제는 소홀히 여겨 음식을 꺼내려면 가위나 끌로 뚜껑을 오려야만 했습니다. 초창기 군용식 통조림은 전쟁터에서 총으로 쏴 열기도 했는데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어버려 먹을 수 없게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양철 통조림이 만들어지고 약 150년 후인 1959년이 돼서야 미국의 에르멀 클레온 프레이즈가 뚜껑에 고리를 부착한 통조림통을 고안해냅니다. 고리를 잡아당기면 손쉽게 뚜껑이 열리는 획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통조림을 열기 위해 아직도 가위와 끌을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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