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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름을 회복할 때
작성자 김문영 작성일시 2017-03-28 11:19:07.0 조회수 263 연월 201703



 

우리가 이름을 회복할 때

취재 글 김문영



영화로 인생 공부하기 세 번째 영화는 제이 로치 감독, 브라이언 크랜스톤, 다이안 레인 주연의 <트럼보Trumbo>다. 1954년 오스카상에 빛나는 <로마의 휴일>을 쓴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의 실제 이야기를 다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시대에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사람들의 상처와 치유를 그린 영화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상과 가치, 종교관, 정치관 등을 타인에게 강제하는 폭력성에 대해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또한 우리 사회에 버젓이 드러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떠올리며 어떻게 해야 진정한 회복과 치유가 가능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숭례문학당 <영화토론모임>의 한창욱 강사와 함께 영화를 감상해보자.

줄거리 “1930년대 대공황과 파시즘의 영향으로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공산당에 가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소련이 연합한 후엔 더 많은 사람이 공산당에 가입했다. 오랜 시간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운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는 1943년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하지만 냉전은 미국 공산당에 의구심을 비췄다”는 자막에 이어, 1947년 로스앤젤레스 트럼보의 집으로 카메라가 들어간다.
욕조와 서재에서 쉴 새 없이 타자기를 두들겨대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가 쓴 영화 속 할리우드 유명 배우 사진들과 포스터가 추억을 소환하며, 흑백영화 촬영 현장으로 이끌고 간다. 당시 화려해 보이기만 한 할리우드는 이념 갈등과 인권 탄압, 노동자 파업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던 천재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는 시위에 앞장서다가 ‘위험한 급진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반미활동위원회의 탄압을 받는다.
한순간에 명예와 부, 일자리 모든 것을 잃은 트럼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기 이름을 감추고 11개의 필명으로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한다. 그런 가운데 <로마의 휴일> <브레이브 원>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두 차례 수상하는데…. 이후 40년 만에 자기 이름을 되찾게 된 트럼보가 자신과 가족, 친구, 시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연설 장면이 압권이다.

우리 모두 틀릴 권리가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헤다 하퍼의 할리우드 반공 뉴스’가 상영되는 장면에서 이야기에 속도가 붙는다. 영화 제작진과 배우들의 임금 인상을 위한 피켓시위와 파업 관련 뉴스는 시위가 폭력으로 변질되었고, 파업을 주도한 인물들을 ‘위험한 급진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여기에 시위 연설 중인 달튼 트럼보가 클로즈업된다. 반미활동위원회의 제이 파넬 토마스 국회의원은 가장 위험한 공산주의 첩자가 방송국과 영화계를 조종한다면서 그 정체를 밝히겠다고 공표하고,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을 솎아내는 일대 회오리가 몰아친다.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이 기본 원리인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블랙리스트(감시 대상 명단, 요주의 명단)’를 작성하고, 그들에게 불이익을 끼치고 강제하는 모순이 왜 일어날까? 이는 예나 지금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실체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추상적 대상’으로 접근하고 신봉함으로써 생기는 오류다. 민주주의의 자유는 성숙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가치다. 자유롭게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견디는 일이다. 서로 의견을 다투다 보면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는데 그걸 인정하거나 알고 싶지도 않을 때 우리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블랙리스트는 자유에 대해 깊이 질문하지 않고, 흑백논리로 편 가르기 하는 미성숙한 사회의 증거물이다. 트럼보와 친구들은 ‘민주주의 수정헌법 제 1조 – 표현의 자유’를 들어 ‘우리 모두가 틀릴 권리가 있다’라고 외치지만 묵살당하고 만다. “수천 명의 할리우드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수천 명이 부당하게 겨냥됐다. 선생님, 군인, 공무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직장을 잃고, 파산하고, 이혼하고, 자살까지 했다. 반미활동위원회는 1975년까지 조사를 계속했다.”

당신은 우릴 잃고 있어
국회모독으로 유죄 판정을 받은 트럼보는 교도소에 들어간다. 출소 후 트럼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존 에봇, 샐리 스터블빌드 등 가명을 쓰며 시나리오 작업에 미친 듯이 매달린다. 교도소에서 얻은 허리통증 때문에 뜨거운 욕조 안에 들어가면서까지 일을 멈출 수 없다. “난 집에서 낯선 이가 된다. 일주일에 7일 일하고 하루에 18시간 일한다. 매분 난 뒤쳐진다”는 그의 고백에서 또 다른 위기를 감지한다. 트럼보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벌어진 틈을 발견한다. 여기서 트럼보의 자기 점검이 일어난다. 내가 지지하고 주장하는 바가 진짜인지, 문제는 없는지,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 가정이다. 일과 성공에 매달리던 트럼보는 점점 독재자의 행태와 언어를 쓰기 시작한다. 딸 니콜라의 16살 생일파티에도 트럼보는 욕조 안에 있다. 화가 난 니콜라가 “아빠는 촛불을 끄는 단 1분, 30초도 함께 있을 수 없느냐”며 욕실 문을 두드리자, “일할 때는 들어오지 마. 절대! 나는 망할 나라가 불에 타도 이 가족의 노예로 살 수 있다. 망할 생일 케이크 한 조각 가지고 방해하지 말라는 것뿐이야”라고 소리를 지른다. 트럼보가 자기 점검을 해야 할 시점이 마지노선에 이르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던 그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가정에서 생계유지라는 이름으로 독재가가 되어가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초상이다.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 때문에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가 드러난다. 나 힘드니까 알아서 너희가 맞추라면서 결국 심리적 보상에 의존하는 모습이다.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린다’라는 명제가 자부심이자 자존심이 되어 어쩔 수없이 하는 일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것이다. 아내 클리오가 트럼보의 잘못을 깨우쳐 주려는 순간에도 그는 ‘집안의 반란과 싸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트럼보가 아내에게 자신이 빠트리고 있는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클리오는 “우리, 당신은 우릴 잃고 있어”라며 ‘당신이 본래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잠시 놓치고 있다’고 다정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그제야 트럼보는 화해를 위해 딸을 만나러 간다.

상처를 치료하려는 의도입니다
마침내 할리우드 대표 배우 커크 더글라스와의 만남으로 성사된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끝맺음자막에 ‘각본- 달튼 트럼보’가 올라감으로써 잃어버렸던 이름을 되찾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영화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선정된 트럼보의 긴 연설은 여러 번 봐도 감동적이다. “모두들 자신의 운명에 반응했습니다. 자신의 욕구, 자신의 신념, 강요된 자신의 환경에 말이죠. 두려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도 피하지 못했죠. 자신의 집을 잃은 사람들의 수, 그들의 파괴되고 잃어버린 가족들. 그리고 일부는 삶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암흑의 시간을 때로는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웅을 찾거나 악당을 찾는 건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 누구도 없었거든요. 피해자만 있었죠. (중략) 어떻게든 모두를 지킨 제 아내는 절 놀라게 합니다. 오늘 제가 하는 말의 의도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상처를 치료하려는 의도입니다. 오랜 세월 지속된 상처와 서로 괴로움을 안기고, 제일 터무니없이 우리 자신에게 괴로움을 안긴 것을 바로 잡으려는 의도입니다.”
우리 시대 이름을 잃은 사람은 누구일까? 이름을 빼앗은 사람은 또 누구인가? 어떻게 그 이름들을 돌려주고 상처를 회복시킬까? 우리는 진정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나, 이어지는 질문 속에서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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