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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곡예의 전통, ’동춘서커스’
박세환 단장
한국 서커스의 명맥을 이어온 동춘서커스는 우리 대중예술의 한 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춘은 영화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서영춘,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장항선을 비롯해 가수 정훈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스물에 동춘에 들어와 수없이 많은 위기에 직면하면서도 끝까지 동춘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동춘은 내 인생의 전부이자 살아갈 힘이기 때문이다.
취재 글 김문영(편집부) 사진 김기현(편집부)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
학창시절, 공부에는 별 관심 없었다. 그 당시 전국 방방 곳곳을 누비며 공연하던 서커스단이 최고 인기였는데, 그 중에도 동춘서커스가 제일이었다. 어느 날 동춘이 동네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쫓아갔다. 곡예사의 아슬아슬한 묘기, 배꼽 빠지게 웃기는 광대놀이, 심금을 울리는 연주와 노래… 정말 황홀할 지경이었다. 평소 배우가 되고 싶었던 마음에 불이 붙었
다. 당시 우리 집안은 종갓집으로 박혁거세 왕릉을 관리하던 경주 지역의 유지였다. 뼈대 있는 집안의 종손이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1962년 겨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수원 지동에 있던 동춘서커스단을 찾아갔다. 어렵사리 입단해 몇 개월 동안 연습생으로 잔심부름만 했다.
포마드로 머리를 싹 쓸어 넘기고 높은 캉캉구두를 신고 첫 무대에 딱 섰다. 눈앞은 캄캄하
고 다리는 사정없이 후들거리는데, 김용대의‘청춘의 꿈’반주가 시작되고 조명이 탁 켜졌다.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 언제나 즐거운 노래를 부릅시다~”악사 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고 급기야 박자까지 놓쳐 쿵작 쿵작 빠른 폴카곡이 쿵자자 쿵작 느린 트로트로 변해갔다.“ 진달래가 생긋 웃는 봄 봄~”진달래는 생긋 웃어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데뷔 무대는 끝났다.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피나는 연습 끝에 남일해, 차중락, 문주란 등 가수들 특유의 육성이나 가성, 허스키 음색까지 나만큼 따라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당시 서커스 무대에서는 그 시대 가수를 얼마나 잘 모방하느냐에 따라 박수가 나오고 안 나오고 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주로 쇼 사회까지 맡게 되었고 연극에서 주연도 도맡는 등 승승장구 했다. 그렇게 내 청춘의 꿈은 동춘의 무대에서 여물어 갔다.
동춘서커스단은 1925년 일본 서커스단에서 갖가지 횡포와 냉대를 견디다 못해 나온 30여 명의 조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1927년 목포에서 첫 무대를 가진 후, 전국을 누비며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해학으로 승화시켜 가난한 서민들을 위로했다. ‘이수일과 심순애’, ‘어머니’, ‘울지 마세요’,‘ 검사와 여선생’,‘ 불효자는 웁니다’,‘ 홍도야 울지 마라’등의 신파극은 서민들의 애환을 진솔하게 그려내 인기를 더 했다. 동춘은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친근한 동무로서 서커스 열풍을 선도했다. 1972년 TBC에서 드라마「여로」가 방영되자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 였고 방영시간만 되면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급속도로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서커스는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외면당했고, 방송국은 서커스단에서 키워 놓은 괜찮은 배우들만 쏙쏙 빼가 버렸다. 동춘을 비롯해 18개 정도 있던 서커스단이 점점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아예 문을 닫게 되거나 간신히 연명했다.

가장 뒷전에 가 앉아라
사실 서커스단을 하면서 가정을 보살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춘에 열정을 쏟아 부을수록 내 가정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전처는 불안정한 생활에 불만이 쌓여 갔고, 덩달아 자식들의 원망도 커져갔다. 뭐라고 이해라도 시켜가며 일을 했어야 했는데, 표현이 서투른 터라 그저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게 되려니…’하고 방치했다. 부부 갈등은 점점 심각해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이 한편으론 야속하기도 했다. 이혼한 후 자식들은 나를 없는 사람처럼 여기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아비 된 도리는 다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뒷바라지를 해왔다. 언젠가는 자식들과 화해할 날이 오겠지만, 아직 어찌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홀로 지내다 12년 전 재혼을 했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지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다.
이래저래 쓰라린 현실이 힘에 부칠 때면 가끔 할아버지 묘터에 가서 조용히 앉아 있다 오곤 한다. 그러고 오면 뭔가 좀 풀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늘 말씀 하셨다.“ 어디를 가든 가장 뒷전에 가 앉아라. 공부를 많이 하면 저절로 앞으로 가게 되느니라.”할아버지는 집안 잔치가 있으면 거지 중 상거지만 데려다 상석에 앉히고 한상 가득 차려 대접했다. 평생 뒷전에 앉을 수밖에 없는 이들을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당신의 명예였다. 그런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삶에 청렴결백하려다 보니 정작 후손들이 살아갈 길을 터주는 데에는 인색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기를 못 펴고 억눌려 지냈다. 당신 자식들은 고생하는데 바깥에 있는 어려운 사람 돕는다고 힘을 쓰니 어린 맘에 그게 못내 섭섭하고, 실속 없어 보여 원망도 많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객지를 떠돌다 집에 들어온 내 손을 잡아 슬며시 손바닥을 더듬어 보고 굳은살이 잡히거나 꺼칠하면 ‘이젠 밖에 나가지 마라’하고, 다른 말은 아꼈다. 그런 할아버지의 속정을 알기에 누누이 당부했던 말씀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창 시절에 동춘서커스에 고아들이 많이 들어왔다. 피는 못 속인다고 그 아이들을 모른 척 하지 못하고 너덧 명을 입양해 자립시켜 내보냈다. 실속 없다며 원망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쩌면 내게 대물려진 듯하다.

내 인생의 전부, 동춘
서커스는 눈속임이 없는 정직한 스포츠에 가깝다. 서커스에는 인간 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인내와 도전이 있다. 무대에 서려면 3년 이상을 철저히 훈련받아야 하고, 아주 잘 훈련 받았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3개월만 그냥 놀아도 몸이 불고, 유연성과 기술이 떨어져 무대에 설 수 없다.
줄타기를 배우던 단원 중 하나가 공중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나게 된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서커스단원은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않으면 경기에 임하기 어려운 운동선수와 같다. 이제 우리 서커스는 명절이나 돼야 일 년에 한두 번 TV로 볼까말까 할 정도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서커스는 관광산업으로 활성화되었는데, 85년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서커스만 사라져가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2003년 추석에 전라남도 광양에서 공연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태풍 매미호가 여수를 거쳐 공연장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추석 전날, 태풍 매미는 사람만 남기고 모든 무대와 장비를 휩쓸어갔다. 속수무책이었지만, 추석공연을 어떻게든 진행해야 했기에 진주 남강변에 전구 다마 몇 개 사고 조잡한 무대 장비와 값싼 포장 천막을 빌어 움막식 서커스장을 지어 놓고 공연을 강행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하루 평균 천여 명의 관람객이 찾아왔다. 공연기간 보름 내내 매진을 기록하는 기적을 본 것이다. 시설도 엉망인 곳에 동춘서커스를 살리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기부한다는 생각으로 공연장을 찾아왔던 것이다. 최악의 위기를 맞아 문을 닫게 될 때마다 사람들은 마치 의무라도 되는 양 공연장을 찾아와 주었다.
동춘서커스는 내 인생의 전부다. 어디를 가나 손가락질 받던 광대들이 모인 곳이지만 삶의 희로애락이 깊이 배인 곳이다.
내 스무 살 청춘의 꿈과 노래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고, 수많은 관객과 함께 했던 눈물과 웃음이 거기에 있다. 나는 결코 동춘을 버릴 수 없다. 동춘은 내가 사는 이유고 기준이고 목적이고 힘이기 때문이다.
아직 후계자를 발굴하지 못해 걱정이지만, 후계자를 세우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동춘서커스가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탄탄하고 풍요로운 상황 속에서 단원들이 마음껏 공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 동춘이 미약하나마 공연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은 동춘의 생명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비록 헤쳐나가야 할 과제들은 여전히 많아도, 이런 생명력을 믿기에 희망을 버리진 않는다.
박세환
1944년 경주 출생. 경주고등학교 졸업. 현재 (사)한국곡예협회 이사장, 동춘서커스 엔터테인먼트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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