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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함께 할 기타를 만나다
작성자 왕은주 작성일시 2014-05-23 18:08:09.0 조회수 1995 연월 201405

평생을 함께 할 기타를 만나다
(왼쪽)엄태흥 | 73세, 수제 클래식 기타 제작 장인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2014, 교학사) 속 ‘음악과 진로’ 인물 인터뷰에 기타 제작가 엄태흥 씨의 이야기가 실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제 클래식 기타 제작가이자 장인 1호인 선친 고故 엄상옥 선생은 1932년 미군이 버린 기타에서 재료를 얻어 직접 만들기 시작했고, 스물셋 아들에게 전수한 기술은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代에 걸쳐 대물림하고 있다. ‘음악을 아는 사람은 악기를 사람처럼 귀하게 여긴다’고 했던 아버지의 말씀을 아로새긴 엄태흥 씨는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장인의 길을 걷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이 같이 맑은 그의 기타 소리는 마음을 만지듯 무던히도 따뜻했다. 오로지 한 길 기타밖에 몰랐다는 장인의 연주에서는 진한 인생의 향기를 품은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소리를 만드는 길에 들어서다

(오른쪽)엄홍식 | 43세, 수제 클래식 기타 제작가

취재 글왕은주/ 사진 김승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클래식 기타를 제작하는 엄홍식 씨. 학창시절부터 직장생활 내내 그의 소개서와 이력서 첫 줄은 언제나 아버지의 이름이었다.흔들림 없이 마음을 다해 기타를 만드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존경과 감탄 그 이상이었다. 항상 집에서 작업하셨던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인지 언젠가 내 손으로 기타를 만들게 되리란 것을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기타 제작가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딱 두 가지를 요구하였다. 자신이 쓸 재료는 자신이 구할 것, 그리고 기타가 안 팔려도 먹고 살만한 준비는 스스로 해둘 것. 아버지의 인생이었던 기타는 이제 그의 인생이 되었다.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기 위해 애쓸수록 뭇사람의 이야기, 인생의 깊은 골짜기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다
어린 시절 남들에게 아버지를 말할 때면 무척 신이 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독특한 직업에다 기타라 하면 국내서 유명했고, 사람마다 ‘선생님’ ‘사장님’이라 불러주니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아버지처럼 기타를 만들 생각을 했는데,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평소 “사람 사는 구경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하고 말씀하셨다. 기타 대신 컴퓨터 분야를 전공하겠다고하니 아버지는 딱 한마디만 하셨다. “고맙다.”
십수 년 뒤, 스마트폰 개발 업무로 스웨덴에서 일할 때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갑자기 트랙터 한 대가 폭설을 뚫고 들어오더니 함께 일하던 동료가 내렸다. 깜짝 놀라 트랙터를 타고온 이유를 묻자 그는 ‘새벽 5~6시에 출근하고 오후 2시에 퇴근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농장 일을 한다’고 했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가업을 잇는 이를 만난 것이다. 풍족하지 않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가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을 보니 내가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사표를 써놓고 고민이 많았는데 당시 나와 교제 중이던 아내가 “어차피 아버지의 일을 할 거면 빨리해라.” 하고 밀어주었다. 우리 집 식구들 특히 반대가 심했던 어머니께서는 장가 못 갈까봐 이다음에나 이어받으라고 성화셨는데 말이다. 아내의 확고한 지지에 억대 연봉을 뿌리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_엄홍식


나만 누릴 수 없는 혜택
아들이 기타를 만들겠다며 제 발로 들어왔다. ‘나 혼자 평생 쓸 나무를 다 비축해놨는데 아들 녀석의 재료는 어떻게 구하나, 나보다 더 나은 기타를 만들어야 할 텐데 비슷하거나 못하면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지 않을까.’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도 아버지로부터 배웠으니 받은 만큼 물려줘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나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니었다.
사실 기타 제작은 내 대代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기타는 생계와 무관해서 해도그만, 안 해도 그만인 취미였다. 공화당 시절에는 간첩이 나타났다고 하면 문을 닫아야 했고, 학기 초나 김장철같이 목돈 들어가는 날만 오면 한 대도 안 팔려 생계유지가 힘들었다. 두 아들에게 나이키 운동화 한 번 못 사줘 봤으니 말이다. 그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차츰 기타가 팔리기 시작했다. 어느 아버지가 고집이나 명분만으로 먹고 살기 힘든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겠는가! 공들여 만든 자식 같은 악기를 팔기 아깝다는 이야기도 다 거짓말이다. 팔려고 만든 것이고, 팔아야 먹고산다. 내가 대학 나와 좋은 직장을 다녔으면 먼지 먹어가며 기타를 만졌을까 싶다. 그저 아버지께서 하셨고, 기타를 연주하고 좋아했던 상황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물론 유명한 연주자가 되고 싶었지만 유학 갈 형편도 안 됐고, 연주자로서의 재능도 부족했기에 스스로 제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_엄태흥


함부로 기타를 만들 수 없는 ‘엄 씨’
2007년 본격적으로 기타 제작에 입문했지만 3, 4년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수입도 적은데다 도무지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작업하는 내 옆에서 두껍다, 얇다 한마디 던지고 가시는데, 그 단어 하나로 어떻게 정답을 찾아야 할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1mm요? 2mm요?” 하고 물으면 되려 혼쭐이 났다. 기타의 두께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을 봐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내심 작년부터 어렴풋이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했는데, 이제는 소리가 예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오랫동안 기타를 만진 사람만 들을 수 있다는 좋은 소리를 찾아 공부하느라 하루해가 짧다. ‘기타 만드는 엄 씨’ 하면 모두 우리 집안인 줄 알기에 열심히 해야 하는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 그래서 함부로 기타를 만들 수가 없다. 가업을 잇는다는 것, 일찌감치 가야 할 길이 정해져서, 그 길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마다할 필요가 있을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집안의 모든 기반을 물려받았고, 아쉽거나 모자란다 싶으면 자기만의 색깔을 입혀 보완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가업을 잇는 것보다 가업을 잇기로 결심하고치열한 이 길을 선택하면서 내 삶이 풍요로워졌다. 이게 진짜 행복이지 싶다. _엄홍식


악기를 만드는 존재 이유

동생(엄태창)도 기타를 한다. 아버지께 같이 배웠지만 우리 기타 소리는 참 많이 다르다. 사교적인 동생은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반면 나는 주로 제작에만 몰두하는 편이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홀로 집중하며 작업하는 것을 즐기다가 오전 9시 즈음 아들이 나올 때 일을 마무리한다. 작업실은 하나지만 부자가 시간을 달리해 기타를 만들기 때문에 부자라도 기타가 다른 건 당연지사. 나는 평균 한 달에 한 대 정도 만드는데, 간혹 일 년 내내 한 대도 만들지 못할 때가 있다. 제작 공정을 따라 만드는 기타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좋은 소리를 내는 기타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인내하며 부지런히 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타는 만드는 사람조차 정답을 모른다.
어떤 이가 자신의 소리는 왜 이렇게 산만한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그건 네 마음이 산만해서다.”라고 말해주었다. 악기는 연주하는 사람의 성정性情을 드러내기 때문이다.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기타로 연주했을 때, 얼마나 그 감정을 제대로 소리 낼 수 있느냐에 따라 좋은 악기인지 판가름 난다. 기타를 제작하는 우리는 이를 재현하는 사람이다. 정상급 연주자뿐만 아니라 그동안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못 이뤘던 꿈을 백발이 된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인생을 위로하고 달래줄 최고의 악기를 전하는 것이 존재 이유가 아닐는지! 기타를 만든 지 50여 년, 기타는 그냥 나 자신이다. _엄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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