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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황홀한 순간 외(한국수필 신인상 등단)
작성일시 2018-05-02 16:06:20.0 조회수 95

20185월호 한국수필 신인상

 

1. 내 생애 가장 황홀했던 순간

 

최기훈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한다. 사십 대는 40, 오십 대는 50, 육십 대는 60, . 그러고 보니 내가 달리는 세월의 속도 또한 결코 느린 게 아니다. 나도 어느새 가속이 붙어 날이 갈수록 더 빠른 세월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은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 기대도 설렘도 사라지고 반복되는 단순한 일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상이다. 거울을 보니 묵묵히 주인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노새의 무망한 눈망울이 아침 햇살에 비치는 내 눈빛만 같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아침 햇살은 넓은 내 이마를 환히 비추고 있다. 그 빛줄기를 바라보며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다. 내게 주어진 남은 날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래 이제부터라도 하루의 시작을 잠시 머리 숙여 묵상하는 일부터 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던 것이고 어쩌면 이 습관이야말로 남은 생애 가운데 더욱 질박한 꿈을 꾸게 하는 나만의 경건한 의식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소설을 읽다가 감동적으로 진한 밑줄을 그으며 마음에 새겼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다.’라는.

 

기지개를 켜고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매만질 즈음 아내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침 식사 하세요!”밥 먹는 하루가 내일도 이어질 텐데 오늘따라 의미 있는 메시지로 들려온 것은 아내와 내가우리라는 한 몸으로 짧지 않은 삼십 년 세월을 살아오며 의식이 제법 견고해졌다는 뜻일 게다.

 

돌아보면 지난 날 참 의미 있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행복이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인 관념이어서 차라리 황홀이라는 말이 더 구체적이고 실감 난다. 언뜻 생각나는 것은 춥고 외로웠던 젊은 날, 나도 어여쁜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면 그녀의 혼수로 장만한 따뜻한 솜이불 속에서 누리는 신혼의 단꿈이 단연 으뜸이었다. 그 순간이야말로 황홀함의 극치일 거라고 상상했었다. 이제와 곰곰 생각해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입학, 졸업, 입대, 취직, 결혼, 득남, 내 집 장만, 가족 여행, 이윽고 어여쁜 손녀를 보았다든가……. 이런 굵직하고 보람찬 일보다 생각날 듯 말 듯 살짝 감춰진 순간들이 더 황홀했던 것이다.

 

유년의 기억은 더욱 아름다웠다. 조무래기 벗들과 어울려 이슥한 여름밤에 술래잡기를 하는 날이면, 나는 마당가 무성한 삼밭(大麻)에 얼른 숨었다. 도무지 찾지 못할 거라는 통쾌함도 있었거니와 삼 잎사귀에서 나오는 그윽하고 숨 막히는 향취에 그냥 거기 머물러 잠들고 싶었다. 정말이지 황홀했다. 그렇게 놀다가도 낮으론 신작로에 이따금 지나가는 버스를 보면서는 저 큰 자동차를 나는 언제쯤 타보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었다. 마침내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백리 밖 큰 고모 댁에 가던 날, 버스 승강구에 발을 내딛는 순간 설렘은 절정에 이르렀다. ‘오 라이!’하는 차장의 경쾌한 신호는 네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졌다. 가만히 있어도 버스는 달리고 있었으니 온 몸 짜릿해지는 황홀감을 집에 있는 동생들은 모를 터였다.

 

구순이 되신 내 아버지는 입때껏 소를 키우신다. 소를 부리는 일은 아버지의 오랜 세월 터득한 기술이기도 하다. 굵은 쇠바퀴로 삐걱거리며 굴러가는 낡은 달구지였지만 소여물로 쓸 짚단을 가득 싣고 어린 아들까지 얹어 아버지는 고삐를 잡으셨다. 그 때의 아버지는 참 대단해 보였다. 게다가 짚단에서 풍기는 무르익은 가을 냄새와 푹신한 질감은 어디에도 견줄 데 없는 황홀경이었다. “아버지, 그 때 그 시절 생각나시죠?” 생뚱맞은 질문에 아버진 까마득한 옛 기억을 더듬으며, “그랴, 그랬었구먼!”밋밋하게 대답하실 뿐이었다.

 

또 있다.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는 그야말로 축제의 한 마당이다. 푸른 하늘아래 시월의 가을운동회는 가슴 부풀게 하는 온 마을 잔치였다. 신나는 하루였다. 더구나 나는 달리기를 잘하여 여섯 명이 달리면 으레 일등을 맡아 놓았다. 그러다가 인근 학교 운동회 날, 학교 대항 릴레이 경주가 있었다. 나는 우리 학교의 대표 선수 네 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 두 번째 주자가 되어 바통을 이어 받았는데 어물어물하다가 그만 꼴찌로 밀려나고 말았다. 내 책임이 컸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바깥쪽으로 달리다가 세 번째 모서리를 돌 때쯤 이윽고 두 명을 추월하고 일등으로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 줄 때의 기분이라니. 출전한 학교가 고작 세 학교뿐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옆에서 선생님은 뛸 듯이 기뻐하셨고 나는 맨 앞에 서서 우승 트로피를 받았으니 내 생애 다시 오지 않을 기쁨의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교도관이라는 직무를 감당하면서 의외로 그릇된 황홀을 꿈꾸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육체적인 행복이 전부인양 본능을 절제하지 못하고 양심을 팔아 순간의 황홀을 꿈꾸는 성범죄자가 그렇고, 불법을 통해 욕망을 채우려다가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절망의 그늘에서 몸부림치는 그들과 함께하는 일과다. 그러기에 나 자신이 먼저 인격을 수양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저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는 가치관이 직업적 소명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단언컨대, 순간의 실수로 범죄가 일어난다는 말은 다분히 합리화된 그릇된 주장이다. 분명한 것은 선한 양심을 의지로 드러내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순전한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직업을 통해 얻은 소중한 교훈이다.

 

내 고향, 충청도 서해안 사투리 가운데호삽다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번쩍 들어 공중에 띠워 올리거나 미끄럼틀에서 스르르 미끄러질 때, 그네를 타고 공중에 높이 올랐다가 내려올 때, 나아가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저절로 내려올 때 긴장되면서도 짜릿한 기분에 빠져들며 재미의 극치에 이르는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렇다. 남은 생애, 그런 순간들이 내게 다시 오지 않는다 해도 마음먹기에 달렸다.

 

황홀은 다름 아닌 일상의 행복이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일에도 감격하면서 내 가족은 물론 지금 만나고 있는 이웃에게 정성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 그러면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모든 날이 황홀하게 펼쳐질 것이니 인생 끝자락에 이르러 내 인생은 참 황홀했었노라고 가슴 벅찬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리라.

 

 

2. 아버지 

 

아버지가 그렇게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어린 날 더러 초등학교에서 무슨 상장을 받아 오기라도 하면, 나는 아버지로부터 인사치레로라도 그래, 우리 아들 최고다!’라는 큰 칭찬 한번 듣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그저 밋밋하게 잘 했구먼!’하는 말씀 한 마디가 전부였다. 언젠가 무슨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을 하여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고 나서 나는 단숨에 달려와 아버지 앞에 그 상장을 내밀었다.

아버지, 이 상()은 아무나 받는 상이 아니에요아버지!”

호들갑을 떨었어도 아버진 예의그랴. 잘 했구먼!’하실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서운했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속마음을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는데, 글을 모르시는 아버지는 아들의 자랑스러운 상장(賞狀)을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러던 아버지가 환한 표정으로 잔뜩 아들을 치켜세웠던 사건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신작로 가장 자리에 매상 벼 가마를 지게로 져 나르는 일을 아버지 혼자서 감당하셨는데 보다 못해 나도 한 번 그 짐을 져보겠노라고 나섰던 것이다. 아버지는 거듭 만류하셨지만 나는 이웃집에서 작은 지게를 빌려다가 작대기를 두 손에 움켜쥐고 땅을 짚은 다음 허리에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그렇게 밝아 보일 수가 없었다.

여보게, 우리 맏이를 보았지? 이제 장정이 다 되었다네. 허 허.”

실은 나도 기뻤다. 성취감이란 작은 것에 더 아름답게 빛나는 법, 아버지는 그 후로 나를 대하는 눈빛이 달랐다. 머잖아 품앗이도 감당할 일꾼이 되겠기에. 지금 헤아려보니 그 당시 정부에서 추곡 수매로 매입하는 벼 한 가마의 무게는 54정도로 그다지 무거운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지게질을 가르쳐 주셨다. 손수 소나무를 베어다 내 몸에 맞는 작은 지게를 만들어 주셨음은 물론이다. 하기야 여전히 지게질이 서툴러 뒤뚱거리며 자빠지기도 하였지만 아버지는 그 때마다 꾸지람 대신 애써 칭찬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러게 뼈가 부드러울 때 지게질도 익히고 농사일을 배워야 하는 겨. 당최 일을 보고 겁내서도 아니 되구.”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입때껏 부농(富農)을 꿈꾸시는 것도 어쩌면 일찍이 학교도 모르고 어린 날부터 당신이 체득한 지게질이 어린 자녀를 위하여 지지 않으면 아니 될, 마치 당신의 십자가인 양 생각하신 것 같다.

나는 지게질을 배우기 전에 젓가락질과 낫질을 배웠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가 따로 차려주는 밥상을 받았는데 할머니 곁에서 젓가락질하는 모양새가 여간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인내심을 가지고 내게 특별 지도로 젓가락질 시범을 보여주시곤 하였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와 중지를 모아 젓가락 하나를 모아 쥐고 다시 중지와 약지 사이에 나머지 젓가락을 끼워서 부드럽게 네 손가락 놀림으로 콩자반까지 너끈히 집어들 수 있는 젓가락질은 지금도 자랑스러운 내 특기로 여기고 있다. 누구나 쉬이 익히는 젓가락질이 무에 그리 대단한 능력인 양 자랑하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지만 놋쇠로 만든 무거운 젓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기술이 지게질만큼이나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은 다 큰 두 아들이 어렸을 적 잘못된 젓가락질을 바로 잡느라 아버지처럼 인내심도 갖지 못하고 조급하게 꾸지람으로 일관했던 기억이 부끄럽기만 하다.

낫질은 순전히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낫질하는 요령을 가르쳐 준대도 애오라지 실전이었다. 한순간의 실수는 피를 보게 하는 처절한 현장 실습이었다고나 할까. 학교에서 돌아오면 망태기를 나무바퀴 하나 달린 외발 수레에 싣고 간사지 논둑길로 달려가서 지천으로 번진 쑥을 베어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 쑥으로 쇠죽을 쑤는데 아침마다 사랑채에 번지는 그윽한 쑥내음은 그야말로 어미소가 입맛 다실 만도 하였다. 지금도 내 왼손 엄지와 검지에 남은 상흔은 그 때 서툰 낫질로 베인 흔적이어서 애잔한 추억이 되고 있다. 그렇게 터득한 내 낫질 실력은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았으니.

우리 아들, 낫질만큼은 품앗이 가도 손색없지! .”

아버지가 인정해주는 내 낫질 실력은 손가락이 유난히 컸던 탓에 가을 벼 베기 할 때 진가를 발휘하곤 했다. 낫질을 할 때는 낫에 너무 힘을 주지 말고 벼포기를 부여잡고 탄력적으로 끌어당기면 한 아름씩 안기는 고개 숙인 벼포기는 낫질로만 얻을 수 있는 보람이자 기쁨이었다.

구순이 넘은 아버지로부터 나는 아직도 한 가지 더 배우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쟁기질이다. 지게질을 배울 무렵 나는 아버지에 대한 일말 존경심이 일고 있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농부라 하더라도 소()를 부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소를 다루는 기술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일소를 만들려면 실한 송아지를 골라야 되고 중소(中牛)가 될 무렵, 아버진 어김없이 소태나무 질긴 가지를 끊어다가 불에 그슬린 다음 코를 뚫어 코뚜레를 꿰고 멍에를 씌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먼저 빈 수레를 끌게 하고 차근차근 쟁기질로 숙달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경험 그 이상의 기술이었다.

이랴! 이랴!(전진) ! !(멈춤) 무러! 무러!(후진)…….”

아버지는 이렇듯 구성진 구령 소리를 내며 쟁기로 철마다 논과 밭을 갈아엎었다. 유난히 자갈이 많은 텃밭을 가는 날이면 나를 불러 쟁기의 목을 누르게 했는데 이는 소가 꾀를 내어 급히 가는 바람에 심경(深耕)되지 않은 까닭에서였다. 그렇다고 쟁기 날을 세우게 되면 힘에 부친 소는 멈춰 서서 푸후- 하고, 거친 숨만 몰아 쉴 뿐이었다. 그날따라 소는 더욱 꾀를 내어 내쳐 달아났는데 보다 못한 아버지는 돌연 소고삐를 바투 잡아채며 - 정지시키는 것이 아닌가.

니가 한번 쟁기를 잡아 봐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 돼!.”

쟁기를 처음 잡아본 그 기분을 누가 알 것인가. 초보운전자가 처음 잡아본 핸들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긴장과 흥분의 순간도 잠시, 주인의 어린 아들이 쟁기를 잡았으니 얕잡아 본 어미소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라는 짐승은 꾀가 없는 동물인 듯 하면서도 한번 꾀를 부리면 걷잡을 수 없는 동물이기도 하여 나는 겁에 질린 나머지 덩달아 !, !’ 큰 소리쳐 보았지만 어찌 주인의 권위 있는 목소리와 같을 손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텃밭을 갈았지만 그 날의 쟁기질은 처음이자 마지막 내 쟁기질이었다.

고향을 떠나 교도관이 되었다. 지금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하루 일 해 열흘 먹는다는 가을걷이는 농부의 진정한 땀의 산물이다. 고추를 거둔 텃밭에 두엄도 내야하고 황금 들녘에 고개 숙인 수수 이삭도 서둘러 잘라야 한다. 외양간 언저리 틈새 밭에 호박도 탐스럽게 익었다. 아버지는 한 마디 더하셨다.

호박은 더 익게 놔둬라.”

부지런한 일손들이 점점 빈들을 넓혀갈 즈음, 대지의 벅찬 꿈은 땀 흘린 농부만이 느끼는 법, 나는 밭갈이로 파 헤쳐진 흙을 맨발로 밟는 감촉을 잊을 수 없다. 굳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성구(聖句)를 들지 않더라도 고향은 늘 가슴에 남는 아버지의 품속이다. 고향의 하늘과 땅과 바람 그리고 내 아버지의 나무껍질 같은 딱딱한 손등과 굳은 살 배긴 발바닥을 기억할수록 와락 부끄러움이 고향 바다의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은 왜일까.

나는 내 아들에게 가르친 것이 별로 없다. 정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을 그 뜨거운 인생의 가르침 하나 심어주어야지 마음먹으면서도 그게 어디 마음으로만 되는 일인가. 밤새 어둠을 밝혀주던 별이 지는 새벽녘에서 쏙독새 울음으로 날이 저무는 저녁까지 들판에서 부드러운 생명의 흙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오신 내 아버지, 그 몸이 바로 교훈이요 가르침이었다.

그렇다. 내 비록 아버지와 같은 농부의 길을 아니 갈지라도 내게 주어진 길이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그 길에 최선을 다할 일이다. 아니 마지막까지 정성을 쏟을 일이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아선 아니 된단다!”

오늘 따라 아버지의 뜨거운 목소리가 가슴에 메아리 치고 있다.

 

심사평

 

최기훈의 <내 생애 가장 황홀했던 순간><아버지>를 신인상 당선작으로 선한다. <내 생애 가장 황홀했던 순간>은 교도관인 작자가 삶에서 맛보던 가장 황홀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교도소에 들어와 있는 수감자들의 그릇된 황홀감에 대해 생각을 펴고 있다. 선한 양심을 의지로 드러내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순전한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직업을 통해 얻은 소중한 교훈이라면서 황홀이란 일상의 행복, 지금 이 순간이기에 정성스러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다짐으로까지 이어진다.

<아버지>는 부자간의 아릿한 교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큰 상을 받아와 자랑하고픈 아들에게 글을 몰라 상장을 읽어볼 엄두도 못 내던 아버지, 그러나 작은 지게에 벼 가마를 진 아들을 온 동네 사람 보란 듯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 그 아버지로부터 배운 지게질, 젓가락질, 낫질들, 그러나 구순이 넘은 아버지께 한 가지 더 배우고 싶은 쟁기질, 그렇게 무식한 아버지는 평생의 스승이셨다.

최기훈의 수필에선 따스한 인간애가 소록소록 스며난다. 인간애는 사람의 향기로 따스한 감동을 불러낸다.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엮어내고 풀어내는 힘은 수필에서 절대적이다. 그 힘을 두 편의 글속에서 확실히 본다. 수필의 중심인 사람과 정과 사랑이 좋은 수필로 독자를 찾을 수 있겠다. 최원현 / 수필가·문학평론가·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당선 소감 

 

고맙습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우리말, ‘고맙습니다를 즐겨 쓴다. 일기(日記)에도 하루 한번은 이 고마움을 기록하고 있다. 이른 바 감사 일기를 쓰는 셈이다. 솔직히 나는 수필에 대하여 이해와 식견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일찍이 수필이 끄는 마력(魔力)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만큼 친근했기에 수필이라는 무형의 문격(文格)에 고마워한다. 하지만 가까울수록 조심해야하듯 더욱 내면의 어진 땀을 흘려야겠다. 글은 인품에서 나오는 향기이기 때문이리라.

 

이즈음 계절은 나무마다 연초록 새잎사귀로 빛나고 있다. 그 중에서 자잘한 느티나무 잎에서 뿜어내는 빛이 나는 되우 좋다. 눈이 부실만큼 아름답다. 그 싱싱함과 부드러움이 사랑스럽다. 자라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나무들은 이렇게 저마다 하늘빛으로 잎사귀를 펼치고 세상을 밝히고 있다. 숲을 이루어 산이 되고 우람한 산맥이 되듯 나도 내 생애 순전한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지극한 꿈이다.

 

내 나이 예순 즈음, ‘한국수필을 만난 것은 크나큰 은총이다. 거기 또 최원현 선생의 각별한 사랑을 잊지 않을 테다. 사랑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순수(純粹)를 느끼고 장성한 두 아들은 아내의 표현대로 우리 집 기둥이자 보배여서 미쁘다. 두 손녀 시은이와 라은이, 손자 건이 무지 사랑스럽다. 며느리는 더 자랑스럽다. 무엇보다 지난 2월 천국 가신 사랑하는 아버지와 믿음의 내 어머니, 온 형제와 이웃 더불어 사랑의 끈을 굳건히 매야겠다.

 

(최기훈 / 崔基勳)

 

약력 

1958년 충남 태안 출생, 태안고등학교, 한국방송대학, 단국대 교육대학원 졸업. 일찍이 교도관으로 서울남부구치소에서 29년 동안 일하다가 현재는 민영 소망교도소에서 갇힌 이웃을 향한 정성을 쏟고 있다. 수용자 교화에 남다른 열정으로 장기수를 위한 민들레편지를 만들어 15년 동안 사랑과 꿈을 심었다. 1999년 세진선교대상, 2007년 한국교정선교사도상, 2010년 대한민국 근정포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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