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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랑은 따뜻한 침묵 · 2
작성일시 2018-03-10 14:18:05.0 조회수 486

 


아버지 사랑은 따뜻한 침묵 · 2

아버지는 나에게 낮은 산이었다. 
쉬이 오를 수 있는 산, 다복솔 우거지고 바위나 돌멩이는 별로 눈에 띄지 않으며 군데군데 붉은 흙이 드러나 있어 산처럼 느껴지지 않아 보이기도 하는 야트막한 산 말이다. 아버지를 낮은 산에 비유하고 싶은 것은 아무래도 평평한 들판보다 산이 주는 안정감이 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땔감을 장만하러 산에 올라도 높은 산보다 낮은 산 계곡 언저리에 떡갈나무나 허접한 땔감으로 쉬이 한 짐을 장만하여 집에 돌아오시곤 하였다.

우리 집은 산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소년 시절 나도 산에 나무 하러 가면 산 주인에게 들킬세라 삭정이와 솔방울이며 삭은 등걸을 부리나케 한 짐 꾸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면 온 마을이 환히 내려다보이고 멀리 서해바다 갯벌까지 볼 수 있는 산이 주는 정감은 응당 내 안에 고향이라는 붙박이 풍경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언젠가 산에 갔던 아버지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알고 보니 아버지의 나뭇짐에서 큰 수꿩 한 마리가 나왔다. 아버지가 잡은 것이라 했다. 아버지가 날고 있는 꿩을 잡은 것이 아니라 마침맞게 꿩을 사냥한 매를 발견하여 작대기로 매를 쫓아내고 그 꿩을 차지한 것이었다. 아버지 덕분에 우리 식구는 모처럼 꿩 고기를 맛볼 수 있었다. 아버지야 돈으로 살 수 없는 고깃국을 식솔에게 먹였으니 은근한 보람이 컸으리라. 

아버지는 그렇게 농사일이 없는 겨울에도 땔감을 장만하여 온 가족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힘쓴 부지런한 아버지였다. 달리 가장(家長)이 아니었다. 충실한 아버지 노릇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불만을 쏟아내고 반항했던 적이 있다. 그 사건은 내가 기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순종(順從)이란 말도 그때 내게 각인되었다.

맨 처음 초등학교는 읍에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초등학교에 다녔다. 4학년이 지나고 5학년 때 마침내 우리 마을에 교실 두 칸짜리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그 전까지는 어린 나이에 십리도 넘는 길을 다니려니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버스는 고사하고 비오는 날 변변한 우산도 없이 걸어 다니는 통학 길은 고역이었다. 비오는 어느 날, 나는 꾀를 내어 학교에 가지 않고 마당가에 딸린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아버지한테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때도 무어라 호된 꾸중을 하지 않았다. 그냥 집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다만 어머니한테 한바탕 혼쭐나고 말았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 길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버스를 타고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책가방은 왜 그리도 무겁던지. 급기야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왜 이때를 분명하게 기억하냐면, 그해 그토록 갈망하던 자전거가 생겼고 집안에 전기가 들어왔다. 가히 일상에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분명 어둠에 비친 광명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기는 비교 의식이 싹트고 반항적인 때였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도 부모님은 안 계시고 논밭에 머물러 있었다. 날이 새고 해가 뜨면서 시작한 농사일은 해 지고 깜깜한 어둠이라야 끝나곤 하였다. 너는 공부나 열심히 해라, 하는 집안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꾸중은 무슨 까닭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나는 아버지께 큰 소리로 말대꾸를 하고 말았다. 불만을 넘어선 당치 않은 분노였다. 그리고는 집에서 뛰쳐나갔다.

집에서 탈출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갈 데도 없었다. 집 앞 개울가로 달려갔다. 개울둑에 엎드려 한참을 울다가 지쳤다. 졸졸 가느다란 물소리만 들려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눈가에 눈물도 말랐고 몸에 추위가 느껴졌다. 집에 들어가야 하나, 마음에 작은 파도가 쉼 없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우리 집 대문 앞에 남포등이 보였다.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남포등을 들고 아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어머니의 성화가 있었을 게 뻔하다. 아버지는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짐작하신 듯하였다.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볼 낯이 없어 다시 개울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버지와 멀어져 갔다. 아버지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누군가 내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들어가서 자야지!” 
슬그머니 나는 집에 돌아왔지만 대문 안에 들어서지 못하고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사랑채 굴뚝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잠이 들었던 것이다. 

아, 아버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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